AI 시대, 노동하는 인간을 다시 묻다 <상> - 일자리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보다

회칙 「고귀한 인류」 단행본. OSV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올해로 반포 135주년을 맞았다. 지난 5월 15일, 레오 14세 교황은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에 서명했다. 이 회칙은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의 존엄을 수호했던 교회의 사명을 인공지능(AI) 전환 시대에 계승하며, AI를 신기술이나 산업 경쟁력의 차원을 넘어 인간 존엄과 공동선, 문명의 방향에 관한 문제로 제시한다.
오늘날 AI는 글·그림 제작, 고객 상담, 전문적 판단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업무 자동화를 서두르고, 노동자는 AI가 자신의 일자리를 대체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AI 시대의 노동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의 증감에 그치지 않는다. 더 근원적인 질문은 ‘인간이 앞으로 노동의 주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이다. 인간마저 생산성과 비용, 데이터로 치부돼 필요에 따라 대체될 존재로 취급되지는 않을 것인가.
「고귀한 인류」는 노동 안에서 “전체 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본질적 열쇠”를 발견해온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 전통을 강조한다.(148항)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능을 발전시키고 가족을 돌보며, 타인과 협력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위기는 단지 소득과 고용의 위기가 아니다. 곧 인간 존엄과 가족, 공동체와 사회정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태」 가르침 계승한 회칙
이러한 가르침은 앞서 「새로운 사태」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산업혁명은 놀라운 생산력과 번영의 길을 보여줬다. 하지만 수많은 노동자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며, 인간은 기계와 자본의 부속품처럼 취급됐다. 당시 교회는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조건, 노동조합의 권리를 옹호하며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당시와 닮아 있으면서도 더욱 근본적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질문이 “노동자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는가”였다면, AI 시대에는 “인간 자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AI는 인간의 육체노동뿐 아니라 지식과 판단, 경험과 창의성의 영역까지 들어오고 있다.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을 위험뿐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경험의 가치마저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회칙은 이 대목에서 현대 기술문명과 인간의 책임을 깊이 성찰한 20세기 가톨릭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말을 인용, “현대인은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93항)고 밝힌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전례 없이 강력한 힘을 얻었지만, 그 힘을 어떤 목적과 가치 아래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영적 성숙이 기술적 능력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 때, 인간이 만든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고귀한 인류」가 기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AI는 위험하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질병을 진단하며, 재난을 예방하고, 장애인과 노인의 삶을 돕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인간이 더 많은 시간을 창의적인 활동과 돌봄, 배움과 관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문제는 기술이 어떤 목적을 향해 설계되고 사용되는가에 있다. 효율성과 이윤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AI는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을 약화시키고, 사람을 손쉽게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인간 존엄과 공동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AI는 인간의 안전과 자유, 창의성과 참여를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기술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
「고귀한 인류」는 AI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설계와 활용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과 우선순위를 담는다고 강조한다.(104항) 따라서 AI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개발하고 소유하며 사용하는 인간과 공동체의 책임에 달려 있다.(105항) 우리는 “AI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넘어 “그 힘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AI라는 새로운 힘으로 우리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 인간의 능력과 효율을 과시하는 또 하나의 바벨탑인가, 아니면 무너진 인간 존엄과 공동체를 함께 회복하는 예루살렘 성벽인가. 그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인간을 기술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섬기게 하는 것, 인간을 대체 가능한 비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참여의 주체로 존중하는 것, 기술 발전의 성과를 소수가 독점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박용승(스테파노)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장 /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