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교회의가 정부의 ‘단계적 낙태 유도 약물 도입’ 방안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위기 임신 여성과 태아의 생명을 함께 보호할 수 있는 지원 체계 마련을 촉구했다.
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생명운동본부 위원장 문창우(비오) 주교와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곽진상(제르마노) 주교는 9월 16일 공동 명의 입장문 「질서 있게 포장된 낙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단계적 지원을 촉구합니다 - 정부의 ‘단계적 낙태 유도 약물 도입’ 방안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입장문은 정부가 임신 9주 이하를 대상으로 낙태 유도 약물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초기에는 의료기관에서 처방과 조제를 함께 시행한 뒤 이후 의사 처방과 약국 조제 방식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안에 대해 “낙태를 ‘질서 있게’ 제도화할 뿐 그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절차의 정교함이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며 “단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은 낙태약 확대 로드맵이 아니라 위기에 놓인 여성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지원의 로드맵”이라고 강조했다.
입장문은 또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어려움을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위기 임신 상담과 주거·생계 지원, 의료와 돌봄, 한부모 가정 지원 등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요청했다.
아울러 “여성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책임지는 사회가 진정으로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라며 “한국교회는 임신의 위기 앞에 놓인 여성과 가정이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상담과 돌봄, 물질적·영적 지원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입장 전문.
질서 있게 포장된 낙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단계적 지원을 촉구합니다
- 정부의 ‘단계적 낙태 유도 약물 도입’ 방안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 정부는 앞으로 임신 9주 이하를 대상으로 낙태 유도 약물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초기 2년은 병원에서 처방과 조제를 함께 하고, 이후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면 의사 처방과 약국 조제 방식으로 전환·확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선 논의보다 한결 정돈되고 신중해 보이는 듯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이 방안이 낙태를 ‘질서 있게’ 제도화할 뿐 그 본질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며, 오히려 생명 경시를 우리 사회에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첫째, 절차의 정교함은 생명을 앗아가는 본질을 바꾸지 못합니다.
임신 9주든, 병원과 약국에서든, 이 약물은 자궁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관리를 단계적으로 정교하게 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직접적인 낙태는 목적이든 수단이든 무고한 인간 생명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라고 가르쳤습니다(58항, 60항, 62항 참조). 오히려 ‘질서 있게 관리되는 낙태’는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국가의 제도 안에 정착시킴으로써, 그것을 정상적이고 당연한 절차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죽음을 더 매끄럽고 조용하게 만드는 일은, 그 죽음을 옳게 만들지 않습니다. 둘째, ‘임신 9주’라는 경계선은 태아를 보호하는 선이 아니라, 생명을 없애도 되는 대상을 정하는 선입니다.
인간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되며, 임신 9주의 태아도 이미 온전한 하나의 인간 생명입니다. 따라서 ‘9주까지 허용한다.’는 기준은 태아를 위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9주까지의 생명은 국가의 보호에서 제외한다.’고 선을 긋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듯, 실정법이 어떤 부류의 인간에게서 마땅히 주어야 할 보호를 거두어들이는 순간, 국가는 법 앞의 평등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2273항 참조). 생명에 경계선을 긋고 그 안쪽을 보호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완화된 조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셋째, ‘단계적 도입’은 제한이 아니라 확대와 정착의 로드맵입니다.
국무총리는 초기 2년의 병원 관리 이후 “의사 처방과 약국 조제 방식으로 전환·확대”하겠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이는 이번 방안이 부득이한 제한적 예외가 아니라, 처음부터 낙태약에 대한 접근을 넓혀 가기 위해 설계된 것임을 드러냅니다. 초기에는 병원이라는 통제된 틀로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고, 이후 그 틀을 풀어 접근을 확대하는 방식은, 낙태약을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고 일상화하는 첫걸음입니다. 이미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도입된 뒤에는 ‘여건이 갖추어지면’이라는 이름으로 안전장치가 하나씩 걷혀 갑니다.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면 확대하겠다.’는 표현 자체가, 이 방안이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넷째,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그 방안이 스스로 안전을 무너뜨립니다.
미프진은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자궁 외 임신 여부 확인과 정확한 임신 주수 확진을 위한 의사의 진찰, 그리고 응급 상황에 대비한 관리가 전제될 때에만 사용하도록 하는 고위험 약물입니다. 그런데 이번 방안의 2단계인 ‘약국 조제’는 바로 그 핵심 안전장치인 의사의 진찰을 제거합니다. 접근성을 넓히기 위해 여성의 안전을 내주는 것입니다. 결국 정부가 도입의 명분으로 삼은 ‘안전’은, 방안이 확대되는 그 순간에 스스로 허물어집니다. 이는 태아의 생명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조차 실질적으로 지키지 못하는 길입니다. 다섯째, 아무리 정교한 행정 방안도 국회의 입법과 국민적 합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입법을 요청했습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권리를 함께 저울질하는 이 중대한 문제는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회에서 깊이 숙고되고 사회적으로 합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계와 조건을 촘촘히 담았다 하더라도, 국회 입법을 우회한 행정 방안은 결국 행정 방안일 뿐이며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합니다. 이에 정부에 간곡히 요청합니다. 정부가 ‘단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은 낙태약을 확대하는 로드맵이 아니라, 위기에 놓인 여성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지원의 로드맵입니다. 위기 임신 상담, 주거와 생계 지원, 의료와 돌봄, 성폭력 피해자 보호, 한부모 가정 지원, 출산 이후의 양육 지원을 단계적으로 확충하고, 남성의 공동 책임을 법적으로 강화해 주십시오. 정부가 ‘제반 여건’을 갖추어야 할 대상은 약국에서 손쉽게 약을 내주는 체계가 아니라,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참으로 자유롭게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을 서로 맞세우는 방식으로는 올바른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는 가장 약한 생명을 없애 여성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사회가 아니라, 여성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책임지는 사회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임신의 위기 앞에 놓인 여성과 가정이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상담과 돌봄, 물질적·영적 지원을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이미 낙태를 경험한 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치유와 용서, 새로운 희망의 길을 열어 가겠습니다. 정부와 국회가 이 방안을 다시 숙고하여,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여성을 실질적으로 돕는 길을 선택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 사회가 가장 약한 이들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26년 9월 16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 생명운동본부 위원장 문창우 주교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곽진상 주교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