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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
시간이란 오묘한 무엇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과거는 어디로 흘러가고 미래는 어디서 오는가?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버거운 질문이다.
일찍이 아득한 창공을 바라보며 시간의 문제를 궁구한 교부가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고백록」 제11권에서 본격적인 시간론을 펼친다. 알 듯 말 듯한 시간의 신비를 앞에 놓고 그는 안타깝게 묻는다. “시간이란 무엇이오니까? 누가 이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까? 누구 있어 이를 생각으로 알아듣고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 있으오리까? 그럼에도 우리의 대화 가운데 시간처럼 예사롭고 알려진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고백록」 11,14)
교부를 괴롭힌 것은 그도 한때 빠져들었던 마니교도의 질문이었다. 그들은 천지창조를 부정하며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천지가 어느 한 시점에 창조되었다면 그 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니교도 이전에 그리스 철학자도 이렇게 물었다. “신들이 무수한 세기를 두고 잠만 자다가 왜 갑자기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나섰을까?” 이것은 창조론을 들고 나온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질문이었다. 천지는 시원이 없이 영원한 듯 보였으므로 답변은 쉽지 않았다. 궁색한 이들은 곧잘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교회사에 빛나는 탁월한 지성에게도 시간은 어려운 문제였다. 궁극의 진리를 처절하게 파고들었던 교부는 결국 이런 깨달음에 이른다. “모든 시간은 당신이 내신 것, 영겁 이전에 당신이 계시오니 시간이 없던 적에 어느 시간도 아니 있었나이다.”(「고백록」 11,13) 그의 오도송은 시간조차 천지창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조차 없었으니 ‘그때’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과학이 도달한 시간 개념과 꼭 들어맞는다. 현대 우주론의 정설인 빅뱅이론은 시간이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데 의문을 품지 않는다. 태초의 대폭발은 공간의 팽창인 동시에 시간의 시원이다. 그러므로 시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공간이 뒤틀린 곳에서는 시간도 일그러진다.
이제 이렇게 말하리라. 시간은 피조세계의 속성이니 창조주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그분은 생성도 소멸도 없으니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영원한 현재로 계실 뿐이다. 그분의 시간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찰나도 영원 같고 영원도 찰나 같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시편 90,4)일 뿐이다.
피조물에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어 세상 종말과 함께 소멸한다. 그것은 그분에게서 나서 그분께로 귀의한다. 인간의 시간은 미래에서 와서 과거로 흐르지 않는다. 켜켜이 쌓인 과거가 있고, 오려고 준비된 미래가 있는 게 아니다. 과거는 스쳐 가버린 시간이니 이미 그분의 품에서 소멸해 버렸다.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니 아직 그 품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우리에겐 순간순간 솟아나는 새로운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이미 소멸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리라.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워 떨지도 않으리라. 오롯이 주어진 오늘을 충실하게 살리라.
2017년을 맞는다. 새롭게 주신 한 해를 감사히 받는다. 벌써 쉰 몇 번째 받는 선물이다. 누가 그분의 은총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는가? 바로 오늘이 축복이고 이 시간이 선물이다. 날마다 솟아오르는 은총의 기쁨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