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마무리되고 기말시험이 끝나고 나면 가끔 학생들이 메일을 보내오곤 한다. 물론 성적에 대한 질문도 하기는 하지만, 안부 인사를 보내거나 수업시간에 다 하지 못한 질문을 하거나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도 한다.
지난해는 조금 특별한 문자와 메일을 받았다. 한창 학기 말로 치닫던 즈음, 낙태죄 폐지 논란이 있었다. 나는 심리상담 분야 강의를 담당하고 있어서 자살이나 낙태, 성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연령층에서 이런 문제들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사실 사후예방이 매우 어렵기에, 건강할 때 제대로 된 죽음 교육, 즉 삶과 생명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자살은 예방교육을 통해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청소년 상담에서 성, 임신, 낙태는 어렵지 않게 만나는 문제다. 따라서 상담사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과 배움이 없다면 상담시 이런 문제와 맞딱뜨릴 경우 제대로 상담을 할 수 없게 된다.
여러 해 전 10년 이상 경력을 지닌 숙련된 상담사가 청소년 임신은 낙태 이외는 답이 없다는 단언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낙태의 심리적 육체적 상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런 결론이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원치 않은 임신의 경우 낙태 외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삶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도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에게 임신에 대해 그 이상의 태도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생명, 성, 그리고 죽음, 낙태 등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강의를 마치고 상당수 학생들이 성과 낙태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여학생들은 ‘단톡’으로 낙태는 여성의 권리이자 여성의 결정권이니 낙태죄 폐지 청원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문자를 받고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고 무조건 옳은 일이라고 찬성했던 여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수업 중에 다뤘던 낙태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가치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그 학생은 처음에는 여교수인 내가 당연히 낙태죄 폐지에 찬성할 줄 알았다고 했다. 여성 리더라면 여성 인권을 주장할 것이고 낙태는 여성의 결정권이기 때문에 당연히 낙태를 찬성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낙태를 생명과 태아의 입장에서 그리고 심리적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살펴보니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이 오히려 일방적이고 차별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또 피임약 광고도 전혀 비판적 시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을 후회하게 됐다고 했다. 한 남학생은 여성을 위해서 낙태죄를 폐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수업 이후 많은 혼란을 겪게 됐고 낙태에 대해 알지 못했던 더 중요한 논의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최고의 학부인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생명과 성을 배우거나 생각할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짧은 논의나 질문에서도 학생들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너무도 많은 낙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낙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이를 선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성, 임신, 출산, 낙태 등에 관해 매우 사실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알 필요가 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은 낙태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낙태를 배울 기회가 제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