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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순경·표영희씨 부부가 영세 후 염수정 추기경과 대부모 한승수 전 총리 내외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세례는 제2의 탄생이다. 하지만 23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은 홍순경(바오로, 80)ㆍ표영희(안젤라, 76) 부부에게 이날은 세 번째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이미 20여 년 전 죽음의 벼랑 끝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부활을 경험했다.
외교관 생활하던 중 닥친 위기
홍씨는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외교관 생활을 한 엘리트 관료였다. 순탄하던 외교관 생활의 위기는 1999년 태국 방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찾아왔다. 평양에서 긴급 소환장이 날아왔다. 국가보위부에서 보내온 소환장은 숙청 통보서나 다름없었다. 평양의 권력 기관들이 벌이는 충성 경쟁의 불똥이 그에게까지 튄 것이다. 그는 한숨과 눈물로 밤을 새우다 마음을 굳히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들 하나라도 살립시다. 탈출합시다!”
당시 큰아들은 평양에 있었다. 태국에 데리고 나온 작은아들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회에서는 누군가 숙청을 당하면 그 화가 가족 전체에 미친다. 직계 가족의 운명은 더 불행하다. 두 아들을 모두 가시밭길로 내몰 것인가, 아니면 큰아들을 잃는 대신 작은아들이라도 살릴 것인가, 이 딜레마 앞에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부모는 없다.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결심했다. 그러나 탈출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여정만큼이나 변화무쌍하고, 할리우드 첩보 영화보다 극적이다.
그와 가족은 태국의 어느 지방 도시에 숨어 망명의 길을 찾던 중 북한 보위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승합차에 실려 라오스 방면으로 끌려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살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호송차량 안에서 난생처음 신에게 매달렸다. “이 차가 뒤집혀서라도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아들이라도 목숨을 건집니다.”
그 순간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을 향해 달리던 승합차가 멀쩡한 도로에서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비탈길로 떨어져 몇 바퀴 굴렀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피투성이가 돼 널브러졌다. 그는 빨리 차에 불이 붙어 죽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과 구급차가 달려와 그와 그의 아내를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수술 가위로 배를 찌르고, 화장실 벽에 머리를 찧어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자살을 시도하는 부부의 절박한 사연을 의사들이 알 리 없었다.
다행히 태국 경찰이 도착했다. 태국 경찰과 북측은 홍씨 부부의 신병 처리를 놓고 숨 막히는 줄다리기를 했다. 태국 정부로선 자국 영토에서 북측 요원들의 외교관 납치는 명백한 주권 침해였다. 이 문제는 급기야 두 나라의 외교적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태국 정부는 북측이 억류하고 있던 작은아들까지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홍씨 가족은 난민보호소에서 1년 8개월 동안 체류한 끝에 2000년 10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서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2010년 작고) 제안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황 전 비서는 그의 탈출을 ‘만사일생(萬死一生)’이라고 말했다.
박신언 몬시뇰에게 교리교육 받아
그는 한국에 정착한 뒤 통일과 북한 민주화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박신언 몬시뇰을 알았다. 박 몬시뇰이 피랍 당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바쳤던 기도를 들어준 존재, 하느님을 6개월 동안 교리교육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 줬다.
염 추기경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홍씨 부부의 삶을 통해서도 이뤄졌다”며 “이제 주님의 자녀로서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그분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홍씨는 “하느님을 충실히 믿으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며 “북녘 동포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길을 여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