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학사 위에 석사, 석사 위에 박사, 그 위에 봉사가 있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봉사는 앎이나 지식을 뛰어넘어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바쁘니까 은퇴한 다음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은퇴한 다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봉사하지 않게 된다. 봉사는 머리나 생각 속에 있지 않고 이 순간에 몸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봉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봉사는 지식에 불과하다. 사람들 사이에 봉사는 추상명사라는 지식으로 녹슬어가고 있는 현실을 자주 실감한다.
세상을 떠날 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관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뻤는가?”와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하였는가?”이다. 이 두 질문에 모두 “예” 할 수 있어야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다. 정말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예”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자신의 몸과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봉사를 한다면 자신도 기쁘고 이웃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봉사는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천국의 열쇠’임에 틀림없다.
오랜 기간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 뽑힐 만큼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피에르 신부는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일한 분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공동체인 ‘엠마우스’의 설립자인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이 컸음을 고백한다. 신앙심 깊은 상류층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와 함께 변두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돕곤 하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그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다가 욕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들아, 불행한 사람들을 보살필 자격을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았지?” 하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몸으로 살아있는 교육을 한 셈이다. “타인 없이 자기 혼자 행복할 것인가? 타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내려야 할 근본적인 선택이라고 피에를 신부는 강조한다.
예전에 어떤 76세 할아버지가 수십억을 대학에 기부하였다. 그분은 당시 후두암 4기에 걸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인데,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잘못하면 독약을 안겨주는 것과 똑같아요.” 자식에게 돈이 갑자기 많아지면 잘못 사용하는 예들이 많다. 차라리 사회로 환원하는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할아버지의 선택은 타인과 더불어 행복하고자 하는 원의가 반영된 것이리라. 최근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로 인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가족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제적인 문제에 있다. 국가가 복지를 높인다고 메워질 수 없는 그들의 상실감에 대한 대안은 이웃을 향한 관심이고 공동체 의식의 복원이다. 이웃 간에 교류가 없는 섬과 같은 상황에서는 ‘돌봄의 영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 영성의 실천이 바로 봉사다.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돌볼 때 진정한 봉사를 실현할 것이다.
필자가 사목하는 본당에서는 겨울을 맞이할 때마다 어려운 이웃과 ‘연탄 나눔’을 실시한다. 이미 본당에서는 연탄 마련을 위해 기부금 모금의 일환으로 돼지저금통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각자 저금하였다가 일정 기간 내에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그 돈으로 연탄을 마련하게 되면 작년처럼 정해진 날 신자들이 모여 릴레이식으로 연탄 나눔을 실시할 것이다. 연탄 한 장의 무게가 처음에는 가볍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거워짐을 느낀다. 이마에 땀이 나고 평소에 많이 쓰지 않던 팔과 어깨 근육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몇 시간이 지나 연탄 나눔이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한구석에 밀려온다. 강론대에서 신자들에게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입으로만 강조하던 나 자신의 위선과 부끄러움이 고해성사 보듯이 일순간 가벼워진다.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게 하는 봉사가 박사보다 훨씬 낫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민수 신부
(서울 청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