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추억’은 유사한 것 같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둘 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다루지만, 추억은 그 ‘있었던 일’이라는 기억에 감정을 더한 느낌이다. 기쁜 추억이나 고통스런 추억처럼 나의 감정이 이입된 기억이다. 그래서 추억은 나와 너, 혹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남과는 무관하다. 어디선가 기억과 추억의 차이를 기막히게 표현한 내용이 있어 소개해본다. “기억은 횡단보도 건너편 수많은 무덤덤한 표정의 행인이고, 추억은 그 행인 속에 숨어 있는 단 한사람인 첫사랑이다.” 기억의 하위개념이라 할 수 있는 추억은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
작년 여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포와 두려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기 위해 본당에서 금요 콘서트를 저녁 8시에 개최하였다. 예전처럼 대성전에 모일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하면서 마당에 작은 의자들과 조촐하게 차려진 무대, 그리고 임시로 설치한 커다란 화면을 준비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초청된 첼리스트는 첼로 연주뿐만 아니라 시네마 콘서트 형식으로 영화를 보여주며 진행했는데, 1시간 반 이상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지루해하지 않고 즐거워했다.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그 첼리스트가 한 다음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기억은 머리에 남는 것이고, 추억은 가슴에 남는 것이다.” 기억은 머리에 사실 그대로 남아 있는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지만 추억은 기뻤던 일,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고통스러웠던 일 등 자신이 과거에 겪는 것이 내 마음에 남아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5월 성모성월에 성모님의 삶을 기억한다. 성모님도 아들 예수님에 대한 추억이 많으셨을 것이다. 갈릴래아 시골 처녀 시절 난데없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얼마나 놀라워했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순명했던 체험이 선명할 것이다. 파스카 축제 때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잃어버린 어린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그분을 발견하고 왜 부모 걱정을 끼쳤냐고 묻는다. 어린 예수님의 대답이 매우 뜻밖이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9) 마리아는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유년, 소년 시절을 보내며 겪었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추억이 되어 마음속에 간직되었고, 일생을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이 후일 아들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시는데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2,35) 고통을 참아내고 인내하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추억은 나와 너, 나와 나의 체험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기억의 한 방법일 뿐이다. 아직까지 사회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 예수님과 함께 한 성모님의 추억은 개인적이거나 가족, 친척, 마을 공동체에 한정되었을 것이나 십자가의 사건으로 급격하게 기억으로 넘어간다. 즉, 성모님의 추억이 기억으로 전환된 것은 십자가상에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결정적이다. 이 말씀에 따라 성모님은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다. 추억은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남게 하지만, 기억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한다. 기억은 체험을 직접적으로 나누지 않은 무관한 사람들조차 ‘남’에서 ‘너’로 변화시킨다. 무수한 ‘너’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신앙의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전혀 무관한 ‘남’을 ‘너’로 전환시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주며,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공경하게 해주는 것은 기억의 힘이다. 5월 성모성월을 보내며 기억에서 망각으로 내몰리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성모님께 전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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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신부(서울 청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