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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기억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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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도미니코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91세. 내가 아는 분들 중 마음이 가장 젊은 할아버지.

성당 앞에서 나를 보고 “수산나!”하고 부르며 싱긋 웃으시던 게 지난 달이었나 그전 달이었나. 노인들 몸은 하루를 모른다 하더니….

내가 아는 그분은 6·25 참전 용사이고, 축산학 박사이고, 제주에서 처음으로 성당 문을 열었을 때 외국 신부님이랑 무뚝뚝한 신자들이 어떻게 성당에서 말을 나누게 할까 고민하셨던 분이다.

“문을 닫아걸었지. 파견 후 30분 정도. 나갈 수 없으니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밖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

어설프게 내가 텃밭을 시작했을 때는 자전거 타고 지나가시다 토마토 가지 옆구리에 삐쭉 나오는 순 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렇게 해야 곁가지가 안 나와 굵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어.”

2013년 성탄에는 성가대 솔로도 하셨다. 여든셋. 음은 흔들려도 용기는 여느 젊은이 못지않았다.

부인이랑 손잡고 버스 타고 여기저기 노래 교실을 다닌다고 자랑하신 분. ME를 다녀온 후 거실 괘종시계 위에 붉은 하트 모양의 ME 상징을 붙여놓고 부부 사이 틀어질 때면 한번씩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는다고 말씀해주신 분.

몇 년 전 6·25가 되면 어쩐지 속상하다며, “참전 용사 일어나 보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우리들 한번 일으켜 세우고 박수 한번 쳐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하신 분.

“우리가 원하는 건 별 게 아냐. 그렇게 기억해주면 돼.”

많이 아쉽고 슬프다.

하지만 오래 아프지 않고 곱게 영면하셨을 거라 믿으며 도미니코 할아버지를 보내드린다.

장례미사가 주일 아침 이른 시각이어서 서울 딸네 집에서 자고 오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밤 막차를 타고 내려온다. 장례미사 참례하는 것 말고 내가 해 드릴 게 없어서.
할아버지가 왜 또래와 달라 보였을까 생각해 보니, 늘 웃으셔서 그랬던 것 같다.

오늘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윤선경(수산나·대전 전민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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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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