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제 인사이동에 따라 새로운 부임지로 옮겼다. 주어진 5년 동안 머물면서 사람들과 장소에 정이 담뿍 들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니 마음이 아련하고 섭섭했다. 환송미사 강론에서 구약에 나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을 거론했다. 75세라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부모와 친척 그리고 고향을 떠나 그분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향하였던 아브라함, 바로 그 아브라함처럼 떠나는 자신을 강조했다.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가지만 정들만 하면 또 다시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사제들의 삶의 방식이다. 어느 한 군데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해야 하는 삶이 ‘길 위의 인생’이라고 할까? 길 위의 인생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어느 한 곳,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늘 이동하신다.
마귀를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신 예수님은 그 고을에 머물지 않으시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8)하고 말씀하시고 떠나신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워하면서 그런 분을 자기 고을에 오래 머무시도록 청한다. 만약에 예수님이 더 머물러 계셨다면 사람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귀한 대접을 받으며 그들이 제공하는 안락한 집과 높은 신분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한군데 오래 머물러 있다면 썩고 역겨운 냄새가 날 뿐이다. 맑은 물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흘러야 한다.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오래 머문 자리에서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적당한 때를 알아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길 위의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신 분이다. 길 위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기에 불안하고 위험하다. 그럼에도 길은 사람과 장소와 사건에 열려 있어 활발한 선택과 교류,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체험을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과 지향이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익숙한 시공간을 떠나 낯선 시공간을 체험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공통이다.
문학평론가로 알려진 김기석 목사가 한 다음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여행은 자기와 만나기 위한 여정이고, 자신과의 대면이기에 변화를 요구한다. 그 앞에 설 용기가 없는 사람, 자기의 취약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길을 떠날 수 없다.” 용기가 없고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낸다. “위험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길을 떠나지 않으면 변화가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을 떠나 길 위의 인생이 된다는 것은 늘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신약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길 위의 예수님’이라면, 구약의 버전은 ‘광야’라 하겠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 겪어온 광야생활은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으로 이끌어 진정한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준다.
구약에서 광야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신약에서 길은 순례자 내지 지상의 나그네임을 일깨워준다. 광야든 길이든 어느 곳에 오래 장착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면에서 서로 통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며 하느님 나라이다.
새로운 부임지에 오니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이 있다. 여기 저기 주변에서 건축 공사가 한창이고 길거리마다 젊은이들이 많다. 근처 대학이나 교육기관도 없는데도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이곳이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 길 위의 인생을 살고 있는 1인 가구 청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령화로 사목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젊은 층의 탈종교화가 가속화되는 이때에 오히려 이 지역으로 끊임없이 유입해 들어오는 청년들에 대한 새로운 사목 가능성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 (서울 상봉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