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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사소한 먼지들의 위대한 사랑(최영일, 빈첸시오,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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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에 대한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자기평가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좌절하고,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느끼기도 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노력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두 극단 중 상한선은 결국 내가 우주의 중심 아닌가 하는 ‘자뻑’이다. 자뻑이라는 표현은 나쁜 의미로가 아니다. 사전에 따르면 (속되게) 자기가 잘났다고 믿거나 자신에게 반하여 푹 빠져 있는 일이라고 한다. 자기애인 나르시시즘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자의식이 없다면 험한 세상 살아나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나 하나밖에 없다. 나는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다.

이것은 사실이다. 가을방학이라는 뮤지션의 노래 ‘가끔 미치도록 너를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예쁜 곡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너를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고는 없는 이 세상 속에’

누군가 나를 대체 불가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크겠는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각각 한 분뿐이고, 나의 딸과 아들은 오직 그 아이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자존감이 자부심이 되고, 자기애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자뻑’에는 부작용도 있으니 그것은 교만이라는 함정이다.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가 유일하다는 것도 인정할 때 성숙한 자존감, 자기애가 된다.

그리고 극단의 다른 쪽, 하한선도 살펴보자. 그것은 나란 존재가 하찮고 보잘것없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별 볼 일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우울감이다. 우리는 뜻밖에 이러한 무력감에 왕왕 빠질 때가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구의 역사를 과학자들이 말할 때 46억 년 정도라고 하고, 우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138억 년 정도로 추정한다. 우리 인간의 삶을 길게 잡아 백 세라고 하는데 천 년, 만 년도 넘는 억 년의 단위라. 우리의 생은 얼마나 짧은가, 얼마나 찰나에 불과한가.

우리 존재의 초라함에 대해서는 성경 창세기에 참으로 허무한 대목이 나온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우리는 하느님이 흙으로 빚은 유한한 존재로 한순간의 시공간에 존재하고 곧 흙으로 돌아가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 코헬렛 1장에서 예루살렘의 임금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두 극단의 평가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우주의 분진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놀라운 능력을 갖춘 먼지이다. 아름다운 생각, 훌륭한 말, 올바른 행동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먼지이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능력을 갖춘 놀라운 먼지인 것이다.

우리 삶의 기적, 우리 인생의 가치는 하찮은 먼지가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그러니 먼지의 삶을 즐기고, 찰나를 사랑으로 채우고, 무한을 지향하라. 무한한 우주도 먼지의 입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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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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