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운 죽음의 문화가 난무하고 있다. 낙태, 자살, 안락사, 사형, 배아줄기세포 등 기존 죽음의 문화는 오래 전부터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연시켜왔다. 게다가 지금도 자살률 증가로 이어질 수 있는 ‘의사 조력 존엄사법’ 제정이나 낙태법 폐지 찬반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져 있어 생명존엄성 훼손의 우려가 있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에 더해 시대가 변하면서 아동학대, 디지털 성폭력, 혐오, 갑질, 인종차별, 성차별, 생태파괴 등의 새로운 죽음의 문화가 우리 사회를 더욱 더 ‘위험사회’로 내몰고 있다.
아동학대나 디지털 성범죄는 반생명적이고 반인권적일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또한 이 두 가지 문제에는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아동 양육의 양극화라는 배경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취약계층의 부모나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부모가 다시 대물림한 학대가 아동학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학대받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는 사랑의 경험을 온라인 게임이나 스마트폰 등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부모의 사랑과 기쁨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디지털 과의존 혹은 중독은 어린 시절부터 뇌의 발달을 저하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이러한 배경 하에 사회악으로 송곳처럼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문화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부의 불평등은 취약계층의 부모를, 그 부모들의 아이들은 학대를, 학대받는 아이들은 디지털 중독으로 성장하고, 결국 청소년 혹은 청년 시기에 사회적 범죄자 혹은 가해자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이해할 때 그 가해자는 어쩌면 이러한 연결고리의 피해자 혹은 희생자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아동학대 혹은 디지털 성범죄 방지를 위한 처벌이나 예방교육도 필요하지만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근본적 치유가 없이는 그러한 범죄행위는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갈 것이다.
‘혐오’라는 말이 이제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혐오의 대상은 광범위하다. 성차별이나 인종 차별, 더 나아가 소수자 차별과 갑질 등이 있으며, 서로 연결되면서 ‘차별과 배제의 정치학’이 공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서구 근대 이성이 이룩한 ‘동일성의 원칙’이 역사 안에서 각종 억압, 차별, 배제를 낳은 결과다. 여성 혐오는 2016년 강남역 인근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에서 사회적 이슈가 됐고, 이는 매우 활발한 페미니즘 논쟁으로 확대재생산 되어왔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는 이슬람 혐오, 난민 혐오, 이주노동자 혐오, 동성애자 혐오 등 다양한 혐오 현상이 사회적 갈등과 대립, 심지어는 폭력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차별, 배제, 폭력으로 작동되는 죽음의 문화는 결국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자본과 권력이 득세하는 비극적 사회로 만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에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은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이다.
타자의 윤리학을 정립한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고 조건 없이 만나는데서 사랑과 생명의 문화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 정신으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한다는 입장에서 이주민이나 난민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벽의 문화’가 아닌 ‘만남과 대화의 문화’로 수용하고 하나가 되기를 권고한다. 개인적인 형제애도 있지만 연대를 통한 사회적 우애를 실천할 때 죽음의 문화는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어려운 이웃과 나눔과 돌봄으로 연대하여 배제되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 (서울 상봉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