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재 우리 교구의 그리스도인, 가정, 단체와 공동체 안에 어떤 생명의 문화가 퍼져 있는지를 명료하고 용기 있게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명료하고 단호하게, 생명의 충만한 진리에 따라 생명에 봉사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길로 부름 받았는지를 밝혀내야 합니다.”(「생명의 복음」, 95항)
위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어떤 생명의 문화가 퍼져 있는지,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것을 왜 명료하면서도 굳이 용기 있게 성찰해야 하는 것일까? 그만큼 명료하지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실천으로 옮기기도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2009년 7월 의료계와 법조계, 사회단체 등 각계 인사들이 여러 차례의 공개토론회를 거쳐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기본원칙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에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을 위한 사회적 합의안’을 제시하면서 존엄사가 의사조력자살로 비칠 수 있으므로 존엄사 대신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합의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연명치료(의료)중단을 존엄사라고 부르며, 이것이 마치 소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것처럼 그동안 줄곧 학계와 여론을 통해 ‘존엄사’라는 용어를 확산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조력존엄사라는 용어도 우리 사회에 쉽게 수용하는 형국이다. 이런 사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 존엄한 죽음인지 헷갈리기에 십상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존엄한 것일까? 김수환 추기경은 이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인간에게는 이런 신성불가침의 존엄성이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이런 존엄성이 있게 하였습니까? 헌법입니까? 아닙니다. 헌법은 이미 있는 인간 존엄성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인간 존엄성은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인간은 아무리 건강하여도, 또는 그의 신분이 아무리 높더라도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고 썩고 맙니다.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이같이 불가침의 존엄성이 있습니까? 인간 존엄성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미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는 것, 곧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가톨릭언론인협회 정기총회 미사, 정동회관, 1998. 3. 7)
우리가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인간 존재가 존엄하다는 것이며, 그 존엄은 인간이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존엄을 우리가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결정으로 생명을 끊어내는 것이 마치 존엄한 죽음인 것처럼 잘못된 생각에 휩싸여 있다. 본래 무의미한 연명 의료와 관련한 문제는 무익하고 불필요한 의료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 다시 말해 환자에게 무익하고 불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의료현장의 그릇된 관행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그 해결책의 핵심도 역시 환자에게 그런 의료행위는 하지 않고, 반대로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행위와 기본적 돌봄은 마지막까지 제공해 드리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논의의 핵심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두고 연명 의료에 관련한 모든 문제를 이를 통해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대다수 사람은 연명 의료를 중단할 권리에 대해서는 알아도 생의 말기에 있는 환자에게 진정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행위와 기본적 돌봄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명료하고 단호하게, 생명의 충만한 진리에 따라 생명에 봉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 생의 말기에 임한 환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는 환자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행위와 기본적 돌봄을 마지막까지 제공할 수 있도록 삶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키고 동시에 정부와 입법자들에게 그에 따른 제도적 개선과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