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부터 45년 전인 중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였기에 가슴은 뜨거웠고, 모든 걸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며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뜨겁던 가슴은 식었고, 신앙은 더 자라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으로 성당을 다니며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무늬만 신자’ 생활을 하다 냉담자가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혹은 길을 걸어가다가 성당이 보이면 중고등학교 시절 장궤를 하고 뜨겁게 기도하던 시절이 떠오르곤 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냉담을 푼 건, 15년 전 성당 부근으로 이사를 하면서였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성당이었지만 마음은 푸근했고, 고해소에 들어설 때도 죄책감보다는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냉담을 하다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에 때론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교리 재교육도 받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다시 신앙을 담금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역사와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삶을 복원하는 전기 작가이기 때문에 역사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당에 다시 나가면서부터는 조선 시대 천주교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 생활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 박해 시대 때 깊은 산중의 교우촌에서는 신부님을 거의 만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심을 다 하는 기도 생활로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는 먼저 십자성호를 그은 후 “천주님, 내 얼굴을 깨끗하게 하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깨끗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옷을 입을 때도 “천주님, 내 육신을 이같이 호위하고 보존하여 주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호위 보전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녁 기도 때는 시작 기도인 ‘성신강림송(지금의 성령강림송)’을 하면서 “임하소서 성신(성령)이여”를 여러 번 반복했다니,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 아침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저녁 기도까지는 못 하기에 어제 하루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손가락질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지를 되돌아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아침 기도를 시작한 후부터는 저도 모르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저에게 아침 기도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하느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되었기에, 새해부터는 저녁 기도도 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