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중견 사원, 중견 작가, 중견 학자 등 중견이 붙는 말이 여럿 있다. 최대 규모를 지녔거나 최고위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어 그 역할을 인정받는 행위자를 뜻한다. 국제정치의 세계에는 중견국이 있다. 초강대국 또는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약소국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있지만, 한국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중견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견국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국제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지키는 데 있어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중견국은 국제사회의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세계에서 보편적 인권의 보호를 강조하고, 지구환경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을 선도하며, 빈곤퇴치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노력에도 열심인 나라이다. 분쟁 해결과 평화 정착을 위해서도 기여를 아끼지 않으며, 또한 강대국에 의한 일방적 행동보다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여러 국가의 총의를 모아가는 방식의 다자주의적 지구 거버넌스를 지지한다. 한국도 지난 30년 이상 이와 같은 노력을 키워오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을 높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사회는 탈세계화의 역풍에 직면해 있고, 민주주의의 후퇴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 그리고 미국과 중국 간 전략경쟁이 날로 심화하고 있다. 국가 간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이 새로운 흐름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속에서 중견국 한국의 외교는 어때야 할 것인가? 4대 강령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의 전략적 자산을 키우고 유지해야 한다. 한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특기 분야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대만은 반도체 강국이다. 그런데 대만은 반도체를 경제적 이윤 창출의 각도에서만 보지 않고 안보와 생존의 수단으로 여긴다. 21세기 산업의 필수품인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독보적 능력 때문에 세계는 대만을 보호하고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네트워크 구축이다. 우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아시아 동맹국인데, 최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네트워크에 참여 여부가 논란이 되어왔다. 미국, 일본, 호주와 인도가 구성하는 쿼드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쿼드의 목표를 중국 견제로 인식하고 있어서 우리의 쿼드 참여 여부가 쉽지 않은 문제로 제기되었던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국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른 네트워크 구성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견국 간의 견고한 네트워크를 짠다면 미·중 사이에서의 눈치 보기를 피할 뿐 아니라, 우리의 외교적 무게와 존재감을 강화할 수도 있다.
셋째, 가치와 국익의 종합적 추구이다. 미·중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국제정치 환경도 양극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 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가 궁극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익이 뒷받침하지 않는 외교는 지속하기 힘들다.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이익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넷째, 전방위적 전층위적 외교이다. 이제 주요국을 상대해서만은 우리의 가치와 이익을 지킬 수 없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중국과의 경제 관계에서 큰 이익을 얻었지만, 앞으로 그런 이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중국과 일거에 ‘헤어질 결심’을 하기는 어려우나 중국 의존을 서서히 줄이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중국을 대체할 단일한 국가나 지역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제는 전 분야에서 전 세계로 뛰어다녀야만 한다. 이를 위한 외교 인프라의 확충은 국가적 명운을 가를 중대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