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만 걸었던 거리가 100리.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를 매일 걸었던 최양업 신부는 쉬지도 못한 채 밤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신자들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 잘 닦인 도로,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정이다.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기획을 시작하며 최양업 신부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걸었다. 조선에서 첫 편지를 쓴 도앙골성지에서 시작해 충청북도 보은 구병산의 멍에목성지를 지나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수리산성지, 페롱 신부와 우정을 나눴던 산막골성지와 마지막 편지를 쓴 죽림굴까지. 최양업 신부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힘든 여정이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충북의 알프스라 불리는 구병산 기슭에 자리한 멍에목성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산세가 수려하다는 것은 걷기에는 녹록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는 이처럼 험난한, ‘길’이 아닌 길을 기꺼이 걸었다.
기획의 마지막 여정은 최양업 신부가 태어난 다락골성지였다.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뜻의 다락골. 이름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운 마을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했던 이전의 교우촌들과 느낌이 달랐다. 산 속에 숨어있지 않고 탁트인 풍경은 그 곳에 들른 이에게 평온함을 전했다. 귀하게 자라 다락골에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기꺼이 험준하고 위험한 길을 향해 나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같은 자리에 남아있는 길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최양업 신부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었다.
민경화 루치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