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고, 2023년 첫날이라는 역을 출발한 시간 열차는 또다시 연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로 많은 이들이 아프고, 모든 이들이 슬프던 연말연시를 지나 새해에는 어떤 인생의 키워드를 뽑아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허리가 살살 아프더니 신경통처럼 눈물이 쏙 빠지는 통증이 찾아왔다.
아, 새해의 선물은 노화구나, 이런저런 질환이겠구나. 적당한 병원을 찾아보고, 의사의 능력이 나를 낫게 해주기를 기원하면서 고대부터 내려오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의사, 의술, 의학에만이 아니라 이 선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봉사를 약속하는 인술의 문제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심리적 고통, 사회적 고통에 모두 적용되는 보편적 선언임을 깨달았다.
과연 현대사회에 역사적 과거 보다 인간의 고통은 줄고, 행복은 늘었는가?
지난해 말 10대 뉴스만 해도 정권교체, 국회 갈등, 우주선 발사, 북한 도발, 지구촌 전쟁 발발, 국내 참사, 장애인 권리 시위, 월드컵 16강, 고물가 고금리 경제위기, 노동개혁이냐 개악이냐 논란 등이다. 과반이 불행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이슈들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고통, 또는 행복과 직결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육체의 고통, 근원적으로는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사처럼 사회적 고통, 그 고통의 근원과 싸워야 한다. 자,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몇 대목을 발췌해 보자.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력을 다해 이 언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나 자신을 주체로 하는 포괄적 약속으로 시작한다.
“환자를 위해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 과잉 치료와 치료 허무주의라는 두 가지 함정을 피해야 한다. 나는 과학뿐만 아니라 의학에도 예술이 있고, 따뜻함, 동정심, 이해심이 외과의의 칼이나 약의 약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대응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확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관료주의나 기능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인간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중요한 이야기인 것이다.
“환자의 회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기술이 필요할 때,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가. 사회적 노력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내 한계가 드러난 곳에서 집단지성과 협력을 만나야 한다. 애초에 출발부터 연대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환자의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환자의 사생활을 존중할 것이다.”
고통받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노출하는 것, 프라이버시 침해를 이제는 2차 가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배려가 고대에도 문제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얼마나 오랜 역사에서 악습과 교훈은 반복되는지.
이 칼럼을 읽는 필자들은 연초 개인의 목표를 다 세우셨으리라 본다. 기부 등 사회적 기여를 포함한 분도 많을 것이다. 새해 1월도 이제 중순이다. 지금은 실천하러 밖으로 나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