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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시선] 당신의 고백은 소중합니다 / 이대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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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당시 생존 후 사망한 학생의 어머니 이야기를 접했다. 비난 댓글과 살아남은 죄책감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아들의 사진을 공개하며 공감을 바라는 어머니의 눈물 앞에 마음이 아팠다. 사실 사제로서 ‘희생자’, ‘사망자’라는 통칭 안에서 한 개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잊고 지내온 듯해 부끄러웠다. 진정으로 바쁜 소임 탓, 혹은 안락한(?) 일상 탓에 세상과의 공감이 뒷전으로 밀려난 나 자신을 강하게 질책해본다.

최근 읽은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이토 저격 후, 사형수 안중근과 빌렘 신부와의 만남에서 고해성사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서로 나눈 대화가 인상 깊다. 자신의 심정을 덤덤하게 밝히는 안중근의 고백이다.

“이 모든 것이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 이 복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이에 대해 빌렘 신부는 대답한다.

“너의 범행을 하느님과 관련지어서 말하지 마라.”

역사적 맥락에서 무언가 아쉬움이 남을 법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해본다면 빌렘 신부의 눈에 비친 조선인 사형수의 모습이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왔으리라 이해해본다.

이 대목을 읽다보니 다른 문학작품 안에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장면이다. 거기에도 사형수 뫼르소와 교정 사목 사제가 마주 앉아 있다. 안중근과 다른 점은 주인공 뫼르소는 그저 살인자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뫼르소는 일반 살인자가 아닌 일상의 통념을 거부한 이방인으로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이 대목은 책을 통해 이해하시길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교정 사목 사제는 사형집행 전 그에게 회개하길 설득한다. 이에 대해 뫼르소는 외친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나에게 이 대목은 죽음에 대한 이론가와 대면한 실존가의 외침으로 다가왔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주제이지만 공고해진 세상사에 대한 주인공의 저항 그리고 반항을 다루면서 사제의 직무를 작품의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장치라는 것이 독자들에겐 다소 고답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작품 속 사제를 통해 다시금 현실 속 나 자신과 비교해본다. 우선 사제의 편에 서 본다. 그들은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 또한 사제직무를 수행하고 특히 수많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푼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그들이지만 비슷한 훈화와 보속을 반복하며 다소 고답적이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마치 시(詩) ‘방문객’의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구절을 잊은 듯 말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사제와 마주 앉은 한 사람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현실 속 우리들도 작품의 주인공처럼 각자의 소중한 고백을 가지고 있듯이 ‘참사 희생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몇 줄의 비난 댓글로 정의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울러 현실 속 사제의 모습을 작품과는 다른 장치로 설정해본다. 한 사람인 라자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처럼 말이다.(요한 11,35)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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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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