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부드럽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가변성 있는 힘이기도 하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사랑을 어떤 모양에 집어넣건 사랑은 바로 그것의 모양이 된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그 주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랑만큼은 도무지 모양이 떠오르지 않는다. 바로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를 담당하고 있다. 사랑을 피워낸다는데, 그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도 모른 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본당의 빈첸시오회 회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기자님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의아했다. 모이는 성금은 모두 사연 당사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후견인에게는 그 어떤 보상도,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데 이 분은 매일같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사순 시기를 맞아 처음으로 이웃 간의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고민이 들었다.
오랜만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성금 전달식이 열렸다. 사연 당사자들은 조건 없이 모아진 독자들의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웃음과 눈물이 뒤엉킨 그들의 얼굴을 보며 빈첸시오회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싹이 트는 기분이었다.
보통 ‘사랑’이라고 하면 과정은 떠올리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과정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건 과정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야 하고, 어려움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야 하며, 그것을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씨앗을 심고, 양분을 주며 싹을 틔운다. 그것은 무럭무럭 자라 봄이 오면 꽃을 피우겠지. 사연 당사자들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웃음꽃을 보며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처럼 흘러가는 마음이 아닌 피워내는 것,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가 이러한 이름 갖게 된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