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일까요?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급히 차에 올라 거칠게 출발합니다. 신호가 연동되어 있는 도로라 한 번에 쭉 달려줘야 하는데 앞차가 주춤댑니다. 버럭 짜증이 납니다. ‘거참, 되게 꾸물대네.’ 복수하듯 차로를 틀어 속도를 콱 높입니다. 다소의 신호 위반마저 감수하며 급히 달려간 곳은, 성당입니다.
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옆 사람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벌써 일 년 넘게 보는 분인데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습니다. 다들 조용히 말(?)하는 가운데 혼자 목청을 높입니다. ‘거참, 되게 시끄럽네. 아예 타령을 하는군.’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미사 중입니다.
작년 1월 1일부터니까 벌써 1년 2개월쯤 되었습니다. 주일과 평일을 포함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미사를 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격리처럼 참례가 불가능할 때는 유튜브 미사로 대체했지요. 남들이 보면 꽤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제 꼴을 제가 잘 압니다. 성당에 간다면서 새벽 댓바람부터 곡예 운전을 하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다지만 옆 사람 어조에 날카로워져 정작 예수님이, 신부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일 년을 개근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한 번 짚어봐야겠습니다. 저는 왜 짜증이 났을까요? 아마 바랐던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를테면 성당까지 한 번에 달리기를 계획했는데, 앞차가 그걸 막으니 화가 난 거지요. 또 새벽잠을 아끼면서 미사에 간 건 평화와 충만함을 얻고 싶어서였는데, 분심이 들어 허탕을 친 것 같으니 분한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실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성당에 가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공간에서 맛보는 마음의 평안, 혹은 오늘도 새벽 미사에 잘 다녀왔다는 성취감을 위해서요. 그게 방해받으니 자꾸 짜증이 났겠지요. 일 년 넘게 새벽 미사를 나가도 별 변화가 없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나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리학에는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라는 이론이 있는데, 이걸 응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느낌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아, 내가 지금 짜증을 내고 있구나.’ 이렇게 ‘수용’하는 거지요. 그리고 에너지를 자신이 ‘전념’해야 할 목표로 돌리는 겁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어디에 전념해야 할까요? 나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는 결심과 행동일 겁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은 그분의 은총을 받겠다는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과 구원사업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이어야 하겠지요. 매일 아침 그 전념을 다짐하는 게 새벽 미사의 참뜻이 아닐까요.
내일 아침에도 저는 미사에 나갈 겁니다. 제가 기뻐할 새벽이기보다는 하느님이 기뻐하실 시간이라고 관점을 바꿔보겠습니다. 거기에 ‘전념’하다 보면 차량의 지체도, 형제님의 타령도 ‘수용’될 수 있겠지요. 오랜만에 새벽 미사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