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중략)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시(時) ‘아버지의 마음’)
이 시(時)를 읽고 있자니 잊고 지낸 기억과 상상의 영역이 시의 여백을 메꾸어가는 듯해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 최근 아버지 기일을 지냈는데 시로 인해 허한 감정의 자리가 더욱 도드라지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시의 위력을 체감한다. 하지만 단지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에만 시가 맞닿아 있지는 않다. 오히려 시를 통해 세상사의 아버지 모습과 더 깊이 연동되어 간다.
사실 이 시(時)를 떠올리게 된 것은 뉴스에서 스치듯 보게 된 사진들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폭격으로 죽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 튀르키예 지진으로 무너진 천장에 깔려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있던 아버지….
이들을 다시금 바라본다. 죽은 자식에게 내민 손길을 보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아버지의 손길이 자식을 어루만지는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과 함께 떠올라 그 아픔이 더욱 절절히 다가온다.
비록 다른 피부색, 언어, 국적 등을 가졌지만 우리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은 시공간을 떠나 누구에게나 공감될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연대는 단지 먼 타지의 아픔과 고통이 아닌 나와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오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나 이 시(時)가 직시하듯 세상의 아버지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시(時)는 긍정적인(보편적) 아버지 모습 이면에 부정적인 아버지의 모습들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최근 뉴스 지면을 채운 ‘아버지’라는 제목과 함께 등장하는 위정자들을 바라본다. 앞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그려왔던지라 머쓱함마저 든다. 그들이 자식에게 내민 손길이 얼마나 큰 영향력으로 가정과 세상사에 작동했는지 뉴스를 통해 가늠해 볼 뿐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폭력(폭탄), 억압(감옥), 타락(술가게)마저도 순수함을 통한 회복을 희망했다. 나 또한 아버지라는 이름이 갖는 보편성이 세상의 연대와 같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데에 더욱 크게 작동한다고 믿는다.
새삼 성 요셉 성월을 보내며 아버지로서의 요셉을 떠올려본다. 온전한 그의 일상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버지로서의 손길이 향했던 곳은 분명했으리라. 목수로서 거친 나무를 구해서 깎고 다듬어 쓸모 있는 가구를 만들고, 이는 아기 예수를 먹여 살린 살림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보편적인 감정은 묻혀있던 요셉 성인의 삶마저 생생히 눈앞에 그리게 한다. 그의 손길이 세상을 구할 구세주를 키웠음을 다시금 떠올린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