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동포 2세 오충공 감독이 선정됐습니다. 오충공 감독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역사학계와 시민운동단체와 연대하여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40년 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상식을 전후하여 팍스크리스티코리아와 사단법인 저스피스의 주관으로 몇몇 천주교 단체들이 연대하여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함께 보고, 관동대지진과 관련한 강연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00년 전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과 비슷한 7.9 규모의 강진으로, 한창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시간에 지진이 일어나 대화재로도 이어져 10만여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난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며 긴급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와 경찰, 민간이 조직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은 약 6600여 명에 달합니다.
오충공 감독의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은 도쿄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 유해발굴을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곳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고 매장되었던 곳입니다. 진상을 규명하려는 일본시민단체가 사흘이라는 한정된 기간을 허락받아 땅을 파보지만,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생존자 조인승씨는 몸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며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일본인 주민들도 어린 시절 적었던 일기를 비롯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목격담을 나눕니다. 영화는 조인승씨의 증언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각종 역사 자료와 일본인 목격자들의 인터뷰를 중간중간 보여주면서, 60년간 땅속에 묻혀있던 관동대학살의 기억을 복원합니다.
영화의 끝자락에 조인승씨는 한 일본인 증언자와 아라카와 하천 옆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일본인 증언자가 학살의 역사를 자손들이 잊지 않도록 전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증언자의 손을 맞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 과거사와 관련해 우리가 가장 듣고 싶은 말, 한일 양국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모습이 바로 그런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3·1절에 대통령은 과거사 언급 대신 일본과 협력하자는 기념사를 낭독했고, 며칠 뒤 정부에서는 일본 전범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배상금을 한국 기업이 대신 내는 해결책을 발표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해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에 더는 사과를 요구하지 말고, 안보와 경제를 위해 협력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자고 정부는 설명합니다. 과거보다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은 언뜻 희망차 보이나, 가해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도록 빌미를 주는 건 아닌가 우려됩니다.
1973년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앞장서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해마다 9월 1일에 그 앞에서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도식을 여는데, 역대 도쿄도지사들도 정중한 추도문을 보내 참회했습니다. 그런데 2017년부터는 도지사가 추도문 발송도 거부하고, 도의원은 추도비 철거를 추진하며, 극우 시민들은 조선인 학살은 누명이라며 추도식을 방해하고 혐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비롯해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관동대지진 때와 비슷한 혐한 유언비어가 퍼지고 상당수 일본인이 이를 실제로 믿는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처럼, 진정한 화해로 나아가는 길이 과거사를 망각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