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앞에 앉은 이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를 두 손으로 만류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큰 물그릇에 예수의 얼굴이 비쳐 드러나 있어 우리는 비로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요한 13,1-20)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독일 화가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 신부의 작품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이다. 상본에 인쇄된 그림 아래에는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이르신 말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 인쇄되어 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녔던 고대 근동 지방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으로 주인집의 종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사랑과 겸손이 담긴 행위였다. 더불어 제자들이 이를 본받아 실천하며 복음 전파를 이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기도 했다. “발 씻김 예식(세족례)”은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정신인 사랑과 겸손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예식이며, 교회는 6세기경부터 이 예식을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전례에 도입하여 거행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박찬정(안나) 학예연구사
※ ‘상본’을 소재로 한 특별기획전 ‘지향 INTENTIO’은 서울 합정동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