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주님을 섬기고 교우들에게 기쁘게 봉사하는 이들이 주위에 많다. 한 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곳 관리장님이 개인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신부님, 제 이름 중간에 받들 ‘봉’(奉) 자가 있는데 부모님께 얼마나 감사드리며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고요? 모든 분에게 모든 것을 해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최고의 서비스 정신을 갖춰야 봉사가 가능하거든요. 제가 매일 주님을 기쁘게 섬기고 성당에 오가는 교우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 6,7)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마르 10,45) 오신 예수님처럼, 교우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연대’에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연대는 우리가 공동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노력할 때에 다른 이들의 나약함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에서 생겨납니다. 연대는 봉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봉사는 다른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노력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 봉사는 ‘힘없는 이들, 우리 가정과 사회와 민족 가운데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돌봄’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봉사를 통하여 개개인은 ‘가장 힘없는 이들의 구체적인 눈길 앞에서, 자신의 바람과 열망과 권력 추구를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봉사는 언제나 이러한 가장 힘없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들과 직접 접촉하며, 그들의 친밀함을 느끼고 때로는 이 친밀함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며,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결코 이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념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봉사하기 때문입니다.”(「모든 형제들」 115항)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된 차량운전 봉사자들이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그들이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능력과 소명에 따라 기쁘게 봉사직을 수행해 오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본당 관할 구역의 3/4이 농촌인데 대부분 70~80대 신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계신다. 봉사자들은 주일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량을 끌고 나간다. 거의 20㎞에 이르는 시골길을 달려 오전 8시30분 미사에 참여하려는 고령의 교우들을 모시러 다닌다. 봉사한 지 20년 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1년도 채 안 되는 봉사자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봉사자는 눈과 비가 내리는 날, 미끄러운 논두렁길을 무엇보다 조심해야 한다. 자칫 논두렁에 바퀴가 빠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본당을 떠나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돌고 돌아 교우들을 차량에 모실 때면 따끔한 충고(?)가 뒤따른단다. 새벽잠이 적은 그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두어 시간씩 걸어 나오시기 때문이다. “뭘 하고 인제 왔디야∼” 어떤 때는 빨리, 어떤 때는 늦게 왔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때때로 밭에서 수확한 오이나 고추, 양파와 같은 뇌물(?)을 포대기에 싸 주시고 명절 때면 허리띠를 풀어 꼬깃꼬깃해진 종이돈을 전대에서 꺼내 주시기도 하는 사랑스런 고객들이란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 일을 하며 살아가는 차량운전 봉사자들이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불타올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온전히 봉사해야 한다는 책임을 깨달으며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활동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그들 얼굴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삶을 엿듣는 동안 지난날 실천 없는 믿음을 보여주며 마냥 평신도들에게 봉사와 희생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하니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전주교구 문정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