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한겨레학교가 토요일마다 빌려 쓰는 영국 초등학교 홀에는, 29개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 큼직한 걸개그림이 있다. 솜씨를 보면 아이들 작품이다. 그림 위에 제목이 적혀 있다. ‘우리 나라들을 기념하자.’(Let’s Celebrate Our Nations.)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다양한 출신 국가를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태극기도 있고 인공기가 있었다. 나는 공공장소에 인공기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평범한 광경이 아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공기를 그리는 것이 영국의 초등학교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학교에는 북한 출신 학생이 절반이 넘지만, 나는 인공기 그리기 같은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남한 부모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조심스럽고, 북한 부모의 생각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 학교에서는 국가 상징을 가르치지 않는다. 인공기를 다루지 않으면서 태극기 그리기를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예 둘 다 가르치지 않는다. 임시방편이다. 언젠가 둘 다 가르칠 날이 올 것이다.
중학생 반에서 국기 수업을 한 적이 한 번 있다. 남북이 통일이 돼 하나의 국가가 되면 어떤 국기를 써야 할지 생각해 보고 각자가 고안한 국기를 그려 보는 활동이었다. 담임교사는 참고 삼아 1882년에 처음 만들어진 태극기, 분단된 후 남한 태극기와 북한 인공기를 보여 주었다. 영국에 사는 영향인지, 아이들은 태극기와 인공기의 특징을 한 국기에 녹여 보려고 했다. 다 알듯이 영국 국기 유니온 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국기를 합쳐 놓은 것이다. 아이들은 나름 창의적이었다. 태극 안에 별을 넣은 학생, 태극의 빨강과 파랑을 섞어 보라색 원을 만든 학생도 있었다. 나는 역사적으로 통일국가의 국기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안다. 독일도 베트남도 ‘이긴’ 편의 국기가 통일국가의 국기가 됐다. 남북한의 경우에도 통일한국의 국기는 태극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깃발을 그려 본 것은 한 편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을 상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영국 학교 복도에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하나 붙어 있고, 학생들의 출신 국가에 색색 핀이 꽂혀 있다. 한반도 남과 북에도 예쁜 색 핀이 꽂혀 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시편 24,1)
이향규 테오도라(런던한겨레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