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12. 춘천교구 화천본당 오음리공소
화천본당 오음리공소는 1963년 설립됐다. 코로나 대유행 이전까지는 공소 교우 40여명과 지역내 군인 20여 명이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할 만큼 활기를 띠었다. 오음리공소 전경.
강원도 북서부 북한강 상류에 자리한 화천군은 동쪽으로는 양구군, 서로는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 남으로 춘천시, 북으로 철원군과 접하고 있다. 이 지방은 대부분 산지이다.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광주산맥이 화천군을 지나면서 대성산, 백산, 백암산, 재안산, 사명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열 개나 된다. 화천군은 산이 깊고 물이 많은 지방이라 선사시대 때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농경, 어로, 수렵을 하며 살았다. 오음리공소 인근 간동면 유촌리에는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남아 있다.
화천군은 고구려 때는 성천군(牲川郡)ㆍ야시매(也尸買)로,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부터 조선 말까지 낭천(狼川)이라 불렸다. 화천(華川)이라 불린 것은 대한제국 광무 6년, 곧 1902년부터이다. 화천은 용화산(龍華山)의 높고 아름다움을 본받고자 한 뜻이라고 전해진다. 화천군은 해방 직후 북한에 속했고, 6ㆍ25 전쟁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다. 화천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특히, 삼국시대 때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화천 지방 확보에 치열했다. 화천은 지금도 휴전선에 접해있는 군사 지역이기도 하다.
화천 지방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교우들이 강원도로 유배를 오거나 박해를 피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교우들이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 지역으로 흩어져 숨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강원도에 유배된 교우들은 주로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복자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강릉, 양양,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됐다. 또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신태보(베드로) 복자는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강원도 횡성 풍수원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해 생활했다.
오음리공소는 올해로 설립 60돌을 맞은 공소이다. 깔끔하게 단장한 공소 내부에 설치된 회중석을 보면 많은 교우들이 공소를 찾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원 화천 지방의 전교 기록들
「죽림동본당 70년사」에는 춘천 신읍리에 사는 최 요한이 1839년 체포돼 원주에서 순교했다고 나온다. 신읍리는 오늘날 화천읍에 소재해 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사 사료에 따르면, 1839년 원주 감영에서 순교한 최 요한은 오늘날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서지마을 교우촌에 살던 최해성(요한) 복자이다. 신읍리 출신 순교자 최 요한에 대한 사료는 좀더 면밀하게 찾아봐야 할 듯하다.
화천 지방 전교에 대한 기록은 병인박해 이후에 나온다. 제7대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 김기호(요한) 회장이 쓴 「봉교자술」(奉敎自述)에 따르면 김 회장이 1876년 10월부터 다음 해 2월 초까지 블랑 신부를 모시고, 강원도의 이천, 평강, 춘천, 낭천(지금의 화천), 철원의 공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화천 지방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진 것은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이다. 1888년 파리외방전교회 르메르ㆍ마라발ㆍ쿠테르 신부가 풍수원성당을 중심으로 사목하면서 화천 지방에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 명확한 증거는 1920년 9월 춘천 곰실에 부임한 김유용 신부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첫 보고서이다. 김 신부는 1920년 10월 20일 자로 쓴 이 보고서에서 춘천ㆍ인제ㆍ양구ㆍ홍천ㆍ화천 등 5개 군에 15개 공소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 신부는 화천군 경우 상서면 신풍리 소대박, 간동면 방천리 윤수골, 상서면 만산리, 신읍면 신덕리 지골 4곳에 공소가 있다고 보고했다. 간동면 방천리 병풍산 남쪽 너머에 이번 주에 소개할 오음리공소가 있다.
춘천교구 화천본당 관할 공소는 오음리와 사창리 두 군데가 있다. 1960년에 설립됐던 신포리공소는 육군 27사단 이기자 부대가 해체되면서 얼마 전 폐쇄됐다.
오음리공소 좌우 벽면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14처. 고풍스러운 나무액자가 정겨움을 준다.
오음리공소
화천본당 오음리공소는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동나무길 16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언덕바지 너른 터에 아담하게 지어진 흰색 벽돌집이다. 오음리(梧陰里) 지명에 관해서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오동나무 숲이 우거진 동네라 해서 오음리(梧陰里)라 불렀다 한다. 오음리가 ‘동림’으로도 불리는데 같은 이유에서다. 다른 하나는 이 지역에 오음사(梧音寺)가 있었는데, 항상 절에서 종소리가 끊이지 않게 들려와 오음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지역 토박이 노인들은 오음리 오음사를 섞어 쓰고 있다.
화천의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이 오음리도 산이 높고 골이 깊다. 그래서 골짜기와 고개 이름이 많다. 오음리에서 유촌리 가는 고개를 ‘나수니’, 춘천 북산면 추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래골’, 오음리 뒤편 죽엽산 옆 골짜기를 ‘망령 골’, 간척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쉬영고개’라 한다.
오음리에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것은 아마도 인근 방천리에 공소가 설립된 때와 같이했을 것이다. 오금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전순들(베네딕토)ㆍ송옥란(베네딕타) 부부의 헌신적인 활동 덕분이다. 오음리 출신인 부부는 6ㆍ25전쟁을 피해 경기도 가평 설악면으로 피난 갔다. 휴전 후 청평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부부는 고향 오음리로 돌아와 교우 16명을 모아 자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했다. 부부는 공소 건물을 짓기 시작해 3년 후 1961년에 완공했고, 당시 관할 본당인 소양로본당은 1963년 오음리공소를 설립했다. 공소 설립 후 매달 한 번 본당 신부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다.
오음리공소는 당시 도로가 열악하고 군사 지역이라는 지리 환경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했다. 교우들은 본당 신부가 방문했을 때 미사에 참례하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공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라고 한다. 그해 4월 대구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이주한 이동정(다윗)씨가 열심한 몇몇 교우들과 의기투합해 공소를 되살렸다. 공소 회장이 된 이씨는 본당 사제를 모셔와 공소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봉헌하고 인근 군인들도 초대해 전례에 함께 했다. 금세 주일 미사 참례자가 40명으로 늘었고, 20여 명의 군인도 공소를 찾았다.
오금리공소는 코로나 대유행으로 또 한 번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대 공소 활성화의 주역이었던 교우들도 이젠 고령으로 거동하기도 힘겹다. 매 주일 오전 9시에 공소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나 미사 참례자 수는 25명 정도로 줄었다. 김윤환(유스티노) 현 공소 회장이 하는 중요한 일은 주일마다 거동이 불편한 교우들을 차로 공소에 모셔오는 일이다.
김 회장은 “이젠 토박이 교우들이 별로 없고 서울, 춘천 등지에서 귀촌한 분들이 많다”면서 “코로나 이후 한두 분씩 공소에 나오는 분이 늘고 있어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오음리공소의 너른 마당 양쪽에는 공소 설립을 기념해 그때 심은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있다. 여기저기 흠집도 있지만 곧고 굵게 잘 자랐다. 올해 오음리공소는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공소 역사를 함께해온 상수리나무와 밤나무처럼 상처는 있어도 늘 푸름을 간직한 신앙공동체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