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를 하루 만에 읽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대주교님의 삶과 북한 지역에서의 선교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소년 시절 다니던 진남포본당, 이후 덕원신학교에서의 수업, 그곳에서 경험하셨던 일제 치하와 해방, 6·25전쟁과 부산으로의 피난, 이후 성직자로서의 삶까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던 서울 주교좌명동본당의 미사와 피난민들의 고해성사, 9·28 수복 후 찾아갔던 평양 주교좌관후리본당에서의 미사와 고해성사 모습이었습니다. 환란이 닥쳤을 때에도 미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신앙을 갈구하고 고백하는 자세를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봤습니다.
6·25전쟁 기간 중 교황사절 번 주교와 비서 부스 신부, 파리 외방 전교회 비에모 신부, 공베르 형제 신부, 가르멜 수녀회 수녀 다섯 분이 연행돼 가셨던 ‘죽음의 행진’ 부분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죽음의 행진’은 1950년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안북도 만포에서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까지 혹한의 날씨와 굶주림을 견디며 280㎞의 압록강 변 산길을 고통스럽게 걸었던 과정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만든 좌와 우라는 이념이 무엇이기에’라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좌와 우라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주의’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을 추슬러 봤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북녘 땅에서 주님을 찾는 기도 소리도 결코 끊어지는 일 없이 이어지고 있으리라”면서 북녘 어디에선가 숨어 있을 교우들의 믿음도 말씀해 주시네요. 오늘날 우리가 매일 저녁 9시에 바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주모경이 이러한 북녘 교우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 합니다.
책을 덮으며 보니 성당, 공소, 신학교, 수용소, 공동묘지 등 찾아가 봐야 할 곳이 31곳이나 발견됐습니다. 통일이 되면 한 번쯤은 가 봐야 할 북녘의 성지순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주교님은 “사상과 이념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민족의 화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올해가 휴전협정 70년을 맞는 해입니다. 주님의 섭리로 우리 민족이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무릎 꿇고 다시 한번 갈구해 봅니다.
박천조 그레고리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