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순명이라는 단어를 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2008년 스페인 부르고스의 가르멜 여자 수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수도원에 한국인 수녀님이 몇 분 계셨는데 제 그림을 우연히 보시고 성모님 성화를 의뢰하고자 연락을 주신 것입니다.
성화를 그리기 전에 수도원에 들러 현장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초대해 주신 덕분에 18일 동안 스페인에 머물게 됐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 창립한 수도원에는 성녀의 낡은 신발이 보관돼 있었는데, 참 인상깊었습니다.
일주일을 수도원에서 보내고 부르고스를 비롯한 스페인 곳곳을 다닐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좋아했기에 버스를 타고 아빌라에 도착한 순간 설레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성당과 중세에 세워진 성벽을 구경하고 밤늦도록 성곽 불빛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의 성화를 보고 싶어서 톨레도를 찾아 갔습니다. 초행길이기에 가는 여정이 녹록지 않았지만 성당에 도착해 엘 그레코의 성화를 보니 행복한 마음에 모든 피로가 사라졌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부르고스의 가르멜 수도원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다음날이 원장수녀님의 영명축일이니 저도 참석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늦은 저녁시간이었고 부르고스까지 가려면 막차를 놓칠 수도 있어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그래도 왔으면 좋겠다”고 거듭 권유를 하셨습니다. 수녀님의 간곡한 부탁에 잠시 고민을 했지만 ‘지금 호텔에 있으면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겠다’ 싶어서 일단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가방을 다시 들고 호텔에서 나와서 급하게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님께 마드리드의 버스 터미널에서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를 탄다고 말씀드리니 시간이 늦어서 버스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꼭 타야 한다고 부탁을 드렸고 총알처럼 빠르게 달려 주신 결과 막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부르고스에 잘 도착해서 잠을 자고 새벽에 수도원에 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니 수녀님들과 부르고스 남자 가르멜 출판사 사장 신부님이 계셨는데, 제가 들어온 것을 보고 제게 전화를 주신 수녀님께서 깜짝 놀란 표정이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수도원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 먼 곳에서 진짜로 올지 몰랐다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신부님께 소개하면서 제 그림 작품집도 함께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그림을 보시더니 수녀님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페인어로 말씀하신 탓에 신부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제게 수녀님은 놀라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신부님이, 자매님이 그린 성모님 그림을 알리고 싶다면서 남자 가르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책에 이 그림을 특집으로 내겠다고 하시네요.”
그렇게 신부님과 인연이 닿아 제 그림이 소개된 책이 얼마 뒤 발간됐고 유럽과 미국, 남아메리카까지 제 그림이 알려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 스페인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순명’이라는 단어가 겹쳐집니다. 톨레도에서 전화를 통해 제게 전한 수녀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달려갔기에 출판사 사장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제 그림이 특집으로 실린 책을 선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순화 가타리나(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