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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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부침 거듭하다 공소 다시 열고 ‘부활’

[공소 公所] 13. 춘천교구 화천본당 사창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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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본당 사창리공소는 1962년 9월에 설립됐다. 춘천교구 공소 살리기 운동으로 재활성화되어 2015년 화천본당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지금의 공소를 건립했다. 화천본당 사창리공소 전경.

화천본당 사창리공소는 평신도 김혜숙 평신도 선교사가 1999년 활동한 이후부터 매해 사순 시기마다 매일 순번을 정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을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사창리공소 교우들이 사순 시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화천군은 화천읍, 간동ㆍ사내ㆍ상서ㆍ하남면 등 5개 읍면으로 이뤄져 있다. 춘천교구 화천본당 사창리공소는 사내면 창안산길 8-13에 자리하고 있다. 춘천 지역 본당의 모태는 1898년에 설립된 풍수원본당이다. 풍수원본당에서 1920년 죽림동본당이, 1923년 홍천본당이 분가했다. 죽림동본당은 1950년 소양로본당을 분가했고, 소양로본당은 1965년 화천본당을, 1966년 운교동본당을 설립했다.

화천군 남서부에 위치한 사내면 사창리는 동쪽으로 화천군 하남면과 춘천시 사북면, 서쪽으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북쪽으로 철원군 김화읍과 접해있다. 사내면은 본래 사탄향(史呑鄕)으로 불렸다. 조선 왕조 41년(1765) 춘천군 도호부 사탄내면(史呑內面)으로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 때 사내면으로 개칭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 이북의 북한 땅 김화군에 편입됐다. 이후 1953년 수복된 후 포천군에 속했다가 1954년 10월부터 화천군에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땅

사창리(史倉里)는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역사 창고가 있는 마을’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를 감추고 있는 고을’로 풀이하고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사창리는 조선 시대 임금의 피난처로 지정될 만큼 군사 요충지였으며, 세상과의 연을 끊고 은둔의 삶을 살던 선비 마을이었다. 사창리는 본래 사탄향이라 불렸다. 또 창말이라고도 했다. 창말은 조선 시대 임금의 피난처로 지정해 놓은 장소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사창리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땅을 빌려주고 그 땅에서 수확한 일정량의 햇곡식을 해마다 군량미로 거두어 이곳 국창(國倉)에 보관했다. 지금도 사창리 버스 정류장 도롯가에는 ‘옛 사탄향의 국창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아울러 사창리는 8개 고개에 둘러싸여 집 짓고 살만한 곳은 3곳뿐이라 해서 ‘3대 8관’이라 불렸다. 예나 지금이나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로 가려면 ‘도마치’(道馬峙)를 넘어야 한다. 도마치는 한북정맥 능선의 하나로 해발 690m 높이의 고개다. 도마치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한 후 도망치다 산길이 험해 모두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라 한다. 도마치 고개를 겨우 넘어 사창리에 당도해도 험한 산과 깊은 계곡뿐이다. 그래서 「택리지」를 저술한 청담 이중환은 이 일대를 사람 살기 적당치 못한 곳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조정에서는 사창리를 임금의 피난처로 정했나 보다.

사창리의 또 다른 이름은 ‘곡운’(谷雲)이다. 조선 효종 임금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숙종에 의해 유배를 떠나는 송시열을 보고 1670년 평감 현감 김수증은 관직을 버린 뒤 이곳 사창리에 은거하며 세상과 연을 끊었다. 김수증은 사창리를 자신의 호를 따서 곡운이라 했고, 사람들은 이곳의 9개 계곡을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창리는 6ㆍ25 전쟁 당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로 육군 제6사단이 이틀 만에 궤멸하는 아픈 역사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천군은 철원ㆍ인제ㆍ양구ㆍ고성군과는 달리 6ㆍ25 전쟁 이전 북한 땅으로 속해 있던 행정구역을 완전히 되찾았다.



활력을 되찾아가는 사창리공동체

사창리공소는 뒤로는 창안산이 에워싸여 있고, 앞으로는 사창내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볕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1958년 또는 1959년께 사창리 지역 한 부대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박복수(요한 보스코)씨가 신앙 공동체 기반을 다졌다. 이후 1962년 9월 교구 승인을 받아 소양로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됐다. 공소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창리 지역 27사단 군종 신부가 자신의 오토바이를 팔아 공소 땅을 마련했다고 한다.

사창리공소는 1974년 군 성당과 합쳐졌고, 1980년 군종교구 이기자본당이 설립되고 성당이 지어지면서 공소 신자들은 그리로 가서 주일 미사에 참여하며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당시 이기자본당 주임이던 송열섭 신부는 1980년 9월 레지오 마리애 사도들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해 군인 가족과 사창리공소 신자들이 함께 활동하도록 했다.

사창리공소는 설립 후 35년 동안 제대로 자립하지 못한 채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러다 1998년 춘천교구가 공소 살리기 운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998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교구장 장익 주교가 사창리공소를 사목 방문하면서 공소 신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새 공동체를 꾸렸다. 사창리공소는 비워둔 공소를 깨끗이 단장하고, 군인 성당과 별도로 공소에서 다시 미사를 봉헌했다. 이때 사도들의 모후 쁘레시디움도 공소로 옮겨왔다.

1999년 평신도 선교사 김혜숙(막시마) 자매가 공소를 돌봤다. 그는 예비신자 교리반을 운영하고, 사순 시기 동안 순번을 정해 매일 교우들이 공소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이 전통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김 선교사는 공소 교우들과 함께 혼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가 김장을 담가주는 등 돌봄 봉사를 했다. 그의 노력으로 미사 참여 교우들이 점차 늘었고, 공소는 자립의 기반을 다질 만큼 안정되어 갔다.

사창리공소는 깜짝 놀랄 만큼 잘 지어져 있다.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은 단층 건물인 사창리공소는 여느 시골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규모다. 현재 공소는 2015년 11월 봉헌된 건물이다. 화천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선교 활성화를 위해 새로 지었다. 공소 교우들은 이 주님의 집을 짓기 위해 당시 화천본당 주임 엄기주 신부와 함께 직접 재배한 오가피와 오미자, 서리태를 춘천과 수원교구 18개 본당을 찾아다니며 판매해 건축 기금을 모았다. 2013년부터 새 공소 건립을 위해 헌신한 사창리 교우들은 2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했다.

현재 사창리공소 교우 수는 230여 명이다. 매 주일 오후 3시 30분에 주일 미사가 봉헌된다. 주일 미사 참여자 수는 60~70명 안팎이다. 하지만 코로나 대유행이 사그라지면서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원구(도미니코) 공소 회장은 “교우들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아름다운 공소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50~70대로 구성된 베아뚜스성가대가 공소의 얼굴”이라고 자랑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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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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