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들은 서품을 받을 때 자신의 삶의 지향을 서품 성구를 통해 드러낸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필자의 서품 성구이다. 부활 시기를 보내며 새삼 세상 안에 당신의 자리를 두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묵상해본다.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겸허함을 따르려 성구를 정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점점 잊혀 가고 있음을 느낀다.
교구 사제의 삶이라는 것이 한 자리에 머물기보단 교회의 명에 의해 여러 자리를 옮겨 다니다 보니 자리에 대한 만족과 감사보단 더 만족스런 자리와 더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갈망하기도 한다. 반면에 그 자리에서 올바르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가라는 성찰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사람과 자리라는 관계에서 전자가 자리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리에 적합한 사람에 관한 문제이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왜곡될 때 결국 ‘저 자리에 적합한 사람은 나’라는 욕망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 갈등과 질투도 여기에서 싹튼다.
잠시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 안에서도 선망하는 자리를 두고 적지 않은 갈등을 목격하기도 한다. 위정자들의 자리싸움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그 과정은 ‘염치없음’을 떠올릴 만큼 낯이 뜨겁다. 저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말하는 논리는 뱉은 말과 살아온 삶의 간격을 보고 있자니 ‘양심없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자리와 사람의 관계를 동양고전에서 다룬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본다. 여러 관계 안에서 각자가 서있는 자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쉽게 말해 득위(得位)하고 있다면 적합한 자리가 될 것이고 실위(失位)하고 있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 자리에서 득위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바로 ‘70의 자리에 가라!’는 것이다. 즉,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것이 득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30의 여유는 창조성, 예술성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실위가 된다. 문제는 실위가 될 때 즉,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게 되면 그 부족분을 ‘권위,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라는 설명이다.(신영복 「담론」)
‘실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가령 우리 사회가 법과 지위와 같은 권위의 힘이 강요되어지고 쏟아지는 말과 말에서 진실과 거짓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결국 능력미달의 위정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최근 한일 외교문제와 관련해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일종의 그러한 기시감이 들어 불안하다. ‘가해자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축약된 논리 이면에 헤아리지 못한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여러 논평들을 살펴보지만 ‘실위(失位)’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님에 대한 환호를 당신을 업은 당나귀가 좋아 날뛰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자리에 있음이 곧 자신의 능력이라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제이든 위정자이든 하느님의 뜻과 민(民)의 뜻에 대한 겸허함이 필요하다. 실위를 극복해내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부활 시기를 보내는 지금, 희망이 아닌 불안을 언급하는 것이 필자 스스로도 유쾌하지는 않다. 하지만 교회 언론 직무를 수행하며 누구나 읽기 좋은 글만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은 필자 자신에게도 실위(失位)가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본다.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