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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선조 박해 피신처에 순례자 쉼터 조성

[공소(公所)] 18. 대구대교구 사기점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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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사기점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를 피해 상주에 살던 교우들이 피신해 지천면 일대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공소다. 소울스테이를 마련해 지난 4월 1일 축복식을 가진 사기점공소 전경.

 

한티 가는 길 2구간 순례 종착지를 알리는 사기점공소 조형물.

 

 


박해 피해 온 이들의 신앙 안식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창평로 315-10 현지에 최근 사기점공소가 새롭게 조성됐다. 한티 가는 길 2구간 순례길인 신나무골성지에서 창평지 사기점공소까지 걷는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처와 쉼터, 숙박지로 마련됐다.

사기점은 칠곡군 지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 지역에 위치한 창평리의 자연부락이다. 신나무골성지에서 출발해 창평지에 도착하기 직전의 도로 좌측 마을이 바로 사기점(沙器店)이다. 이 마을 골목길로 접어들어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제법 넓은 터를 가진 깔끔한 공소가 나온다.

지천면 사기점은 ‘동제’(洞祭)로 유명하다.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 팽나무에 제사를 드린다. 동제가 시작될 무렵이면 당산 제단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일반인의 접근을 막는다. 제사는 유교식으로 치러지며 마을의 평안과 주민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대구대교구 신동성당 뒤편인 지천면 창평리, 백운리, 심천리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시대 때부터 교우들이 살았다. 경상도 땅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790년대 후반이다. 1798년 홍주 출신 황일광이 천주교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아우와 경상도로 이주했다. 또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도 같은 해 경북 안동 우련밭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사영 백서에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신자들이 경상도로 피난 가서 살았다고 한다. 아울러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ㆍ진보ㆍ영양ㆍ안동에서, 1827년 정해박해 때에는 상주와 순흥 등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됐다.



박해시기 옹기 구워 팔며 생계 유지

칠곡군 지천면 연화2리에 자리한 신나무골성지만 해도 1815년 을해박해를 계기로 생겨난 교우촌이다. 1815년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 봉화 우련전과 곧은정 교우 33명이 체포돼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가족들과 교우촌 신자들이 이들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대구 인근이면서도 숨어지내기 적합한 곳을 찾아 신나무골에 몰래 정착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상주와 안동의 교우들이 체포돼 경상 감영에서 순교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지역 교우들이 신나물골에 자리 잡고 순교자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신나무골은 이렇게 순교자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과 교우촌 신자들이 이주해 와 살면서 이룬 교우촌이다.

또 칠곡군에는 팔공산과 가산 등 제법 높은 산이 있다. 그 첩첩산중에 신나무골 교우촌처럼 경상도 북부 지역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시작했다. 박해 시기 칠곡군 지역의 교우들은 주로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칠곡군 일대에는 ‘옹기굴 작은 신앙 공동체’ 곧 옹기굴 공소가 많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요셉)도 장자골 옹기굴에서 칠곡으로 이주해와 옹기장사를 했다. 한티교우촌도 칠곡군 소학산 장원봉 아래에 자리한 장자동교우촌도, 신동교우촌도 모두 옹기굴 공소였다.

흙을 구워 만든 그릇에는 사기, 질그릇, 옹기가 있다. 그중 사기(沙器)는 장석과 석영 가루를 빚어 잿물을 덮어 희고 매끄럽게 구운 그릇이다. 창평리 사기점은 그릇을 빚기에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마을 앞에는 고운 모래가 있는 내가 흐르고 있다. 또 마을 사방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든지 가마를 지필 땔감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옹기장들이 모여 살면서 사기를 만들어 팔았다. 이에 구한말부터 마을에 흐르는 내를 ‘사천’(沙川)이라 했고, 마을 이름을 ‘사기점’(沙器店)이라 불렀다.



순례자 숙박시설 ‘소울스테이’ 갖춰

창평리 사기점에 교우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60년 경신박해 때로 추정하고 있다. 경신박해 당시 상주 사람 이종근의 가족과 교우들이 백운리 길봇(질봇)에 피난 와 정착했다. 이종근은 대구대교구 이대길ㆍ이용길 신부의 고조부이다. 이 무렵 창평리에 살던 이환(스테파노) 가정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심천리에 이문(베난시오) 가정과 창평리 듬우에 배석기(루도비코) 가정이 살았다. 또 지천면 신1리 웃점에는 순교자 집안의 후손인 조순필(요한) 가정과 서학용(바오로) 가정이 살았다.

지천면 일대 옹기점을 하며 살던 교우들은 자기 집을 기꺼이 공소로 내놓으며 교우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지천면 일대 옹기점 공소 중에서 면 소재지에 있던 신동 웃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다. 지천면은 광주 이씨, 벽진 이씨,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었다. 이들 가문의 반대로 성당을 지을만한 땅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실에 본당이 먼저 설립됐다.

글머리에 창평리 사기점공소는 대구대교구와 칠곡군이 조성한 한티 가는 길 2구간 종착지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한티 가는 길은 왜관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성지, 창평지, 동명성당, 진남문, 한티순교성지까지 45.6㎞를 걷는 순례길이다. 창평지 사기점은 또 조선 시대 한양 과거길에 오른 영남 선비들의 휴식처였다.

대구대교구와 칠곡군은 한티 가는 길과 한양 과거길의 의미를 살려 지난 4월 1일 사기점공소에 소울스테이 축복식을 거행했다. 한티 가는 길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와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기점공소 숙박 문의: 054-975-5151 한티순교성지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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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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