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22. 대구대교구 고아본당 송림공소
1894년 설립된 대구대교구 고아본당 송림공소는 구미 지역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이다. 알빈 신부가 설계하고 지은 송림공소 전경.
대구대교구 고아본당 송림공소는 경북 구미와 선산 지역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로 불릴 만큼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다. 이곳 교우들은 1894년께 설립된 송림공소에서 구미 지역 모본당인 원평본당과 1996년과 2003년에 설립된 도량ㆍ고아본당을 분가시켰다고 자부한다.
송림공소는 경북 구미시 고아읍 송평구길 24에 자리하고 있다. 고아(高牙)는 ‘높은 곳에 깃발을 꽂은 아성’이라는 뜻이다. 고려군이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치를 때 왕건이 매봉산 아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해서 매봉산 주변 송림과 괴평 마을을 ‘고소아리동리’(高所牙里洞里)라 불렀고, 이를 줄여 ‘고아’라고 했다. 고아읍 남쪽에 자리한 송림리는 매봉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인노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지형이다. 이 마을이 ‘송림’으로 불린 것은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매봉산에 소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초반 송림에 옥천 육씨가 가장 먼저 정착했고, 이어 밀양 박씨, 안동 권씨, 전주 이씨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경상도 교회 괄목하게 성장
경상도 교회는 1862년에 예비 신자가 1000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대됐다. 19세기 중반 경상도 교회가 괄목하게 성장한 배경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교우들이 문경, 선산, 상주, 성주, 김천 등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860년 경신박해 당시 경상도 교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상도는 예비신자가 1000명가량 되었고, 복음이 매우 빨리 그리고 성공적으로 전파되던 훌륭한 지방이었으나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주민들이 신자들을 모함하고 관장들에게 탄원서를 올려 그들을 관할 지역 밖으로 내쫓을 것을 호소했습니다. 지옥이 지핀 이러한 수작은 거의 어디서나 환영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엾은 교우들은 이 지역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한 채 돈도 생계수단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성사도 받을 수 없고 만나서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도 없어 교우들은 실의에 빠졌고, 교리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도 잃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활기를 잃고 복음 전파는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 이후 어렵고도 중요한 이 구역을 아콘 주교에게 맡겼습니다.”(1862년 11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장방형 강당식 건물로 단순하게 지은 송림공소는 교우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대와 제단 십자가로 집중할 수 있도록 천장 선을 유도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여진교우촌 토대로 1948년 구미공소 설립
고아 송림 마을에 가톨릭 신앙이 처음 전해진 것은 오늘날 낙산공소가 자리한 선산군 해평면 여진교우촌에 살던 권치하(시몬)가 1894년께 송림으로 들어와 남의 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진교우촌에 살던 교우 남만억이 1894년 송림에 와서 참봉 권치하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줬다는 것이다. 어쨌건 송림공소는 권치하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권치하의 셋째 아들인 권성중이 1930년 구미로 이주해 살았고, 1935년 권치하의 둘째 아들 권익중도 구미로 와 익중의 집에서 주일 첨례를 했다고 한다.
또 1940년께 송림에서 세례를 받은 박 율리안나의 아들 이재원이 구미로 왔고, 같은 시기 권익중의 질녀 권 루치아가 왜관에서 구미로 이사를 옴에 따라 교우 가정이 네 집이 되고 차츰 이들의 전교를 통해 세례받은 이들이 늘어나 1948년 구미공소가 설립됐다고 한다. 이 공소가 1956년 12월 30일 구미본당(오늘날 원평본당)으로 승격됐다. 그래서 송림의 교우들은 자기 공소가 구미 지역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라고 지금도 자랑하고 있다.
고아 송림공소 교우들은 1906년 선산군 고아면 송림동 102번지 목조 기와집을 사들여 공소 건물로 사용했고, 1933년에 송림동 210번지에 새로운 공소를 마련했다. 구미 지역 선교와 사목을 맡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1967년 지금의 송림공소 대지를 장만해 현대식 공소 건물을 지어 사용하고 있다.
송림공소의 마룻바닥은 고된 세상살이로 무뎌진 신앙 감각을 촉감으로 일깨워주는 신앙의 흔적이다.
알빈 신부 설계로 장방형 강당식 건물 건축
송림공소 역시 알빈 슈미트 신부가 설계했다. 장방형 평면에 시멘트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다. 알빈 신부는 넓지 않은 대지의 제약 때문에 공소 건물을 주로 장방형으로 지었다. 알빈 신부는 기둥이 없는 긴 강당식 형태의 공간을 구성하되 신자들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제대와 제단 십자가로 집중할 수 있도록 천장 선의 흐름을 제단으로 향하게 꾸몄다. 또 제단과 성당 양쪽 벽면에 좁고 넓은 다양한 형태의 창을 내 공소 내부 공간을 밝고 온화하게 꾸몄다. 그리고 성당 외부에는 항상 십자가가 달린 종탑을 지어 이 건물이 하느님의 집임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송림공소는 아직도 마룻바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룻바닥은 하느님을 향한 송림공소 교우들의 신앙 흔적이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삐걱대는 마룻바닥도 있지만, 맨발바닥에 전해지는 냉기와 나무의 촉감이 세상 시름에 무감각해진 영혼을 활짝 깨우는 듯하다.
마을 전체의 유동 인구가 적고 젊은이들도 많지 않아 현재 송림공소는 예전의 활기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간혹 예비신자가 생기면 차로 10분 거리에 자리한 고아성당에서 교리교육을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30여 가구 40여 명의 교우가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점차 회복세에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