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25.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새점터공소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새점터공소는 1905년 공소 설립 이후 사랑과 나눔으로 신앙공동체를 유지해온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2018년 새 단장한 새점터공소 전경
강원도 지역 첫 본당인 풍수원(1888년 6월 20일 설립)에 교우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이다. 박해를 피해 각지에서 풍수원 일대에 숨어든 교우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그 대표적인 교우촌이 바로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월송석화로 429-3에 자리한 새점터공소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는 동쪽으로 공근면과 원주시 호저면, 서쪽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과 청운면, 남쪽으로는 원주시 지정면, 북쪽으로는 홍천군 남면과 접해 있다. 조선 시대 원주군 고모곡면에 속했던 이곳은 1895년 횡성군에 편입됐고, 일제 강점기 때인 1937년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라 강원도 4대 서원 중 하나인 칠봉서원의 서원사 이름을 따서 ‘서원면’으로 바뀌었다. 또 석화리는 이곳에 꽃 모양의 바위가 있어 ‘돌곶이’라 부르고, 한문으로 ‘석화’(石花)라고 쓴 것에서 유래했다. 새점터는 과거 석화2리 5반에 속하는 마을로 사기를 굽던 가마가 있어 ‘사기점터’라 하던 것이 줄어서 붙어진 이름이다.
신유박해 순교자 유족 40여 명 교우촌 이뤄
강원도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결정적 계기는 조선 왕조가 주도한 박해 때문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교우들이 강원도로 유배를 오거나 박해를 피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교우들이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 지역으로 흩어져 숨어 살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선포되고 가톨릭 신앙이 전해 내려왔다. 이 시기 강원도에 유배된 교우들은 주로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복자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강릉, 양양,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됐다. 또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에 앞장섰던 신태보(베드로) 복자는 1802~1803년께 순교자 유족 5세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강원도 횡성 서원면 유현리 깊은 산골 풍수원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었다.
“박해가 마침내 가라앉기는 했으나 우리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었고, 모든 경문 책을 잃었다.… 나는 우연히 몇몇 순교자 집안의 유족이 용인 지방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만나게 됐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한 정이 들게 됐다.… 우리는 함께 이사하여 다른 곳으로 가서 외딴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어 살 생각을 하게 됐다.… 각기 재산이라고는 빚밖에 없었으므로, 집들을 팔아 빚을 갚고 나면 여행에 필요한 노비도 채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곳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이 성사되든 말든 이사는 하기로 결정됐다.… 8일 동안 무척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11~13쪽 참조) 신태보와 순교자들의 유족들은 척박한 땅에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에 충실했다. 이 전통이 지금도 풍수원본당과 관할 4개 공소 지역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새점터공소 내부. 2018년 새 단장 때 원주교구 무실동성당에서 사용하던 제대와 독서대 등을 기증받아 꾸몄다. 옛 제대는 출입구 탁자로 사용 중이고, 절골에 살던 승휘표(펠라치오)씨가 1991년 기증한 옛 의자는 풍수원본당 유물고에 보관 중이다.
1905년 정규하 신부가 새점터공소 설립
풍수원성당에서 새점터공소까지는 지방도로 약 12㎞ 떨어져 있다. 하지만 산길로는 8㎞, 20리 길을 걸으면 갈 수 있다. 새점터에 처음 정착한 교우는 장순기(안드레아) 회장이다. 그는 1884년께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7살 무렵 아버지가 순교하자 떠돌아다니다 10살 때인 1895년 새점터에 움집을 짓고 정착했다. 이후 최씨, 강씨, 신씨, 송씨 집안의 교우들이 새점터로 이주해 교우촌을 이뤘다. 장순기는 20살 때 풍수원본당 주임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중매로 혼인해 4자녀를 두고 그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다.
1905년 정규하 신부가 새점터공소를 설립한 후 장순기는 초대 회장이 됐다. 그는 주일 공소 참례 때 교리 문답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교우들에게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했다. 공소 교우들은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고 사기를 구워 연명하는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공소를 찾으면 새 창호지로 제대 벽은 물론 공소 천장과 벽을 새로 도배해 정갈하게 공소를 꾸밀 만큼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장 회장을 비롯한 후임 공소 회장들은 미사 때마다 풍수원성당으로 가서 미사 가방을 등에 지고 사제를 모셔오고 모셔다 드렸다. 또 교우들은 십시일반 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공소를 찾은 사제를 대접했다.
새점터공소 교우들은 너무 가난해 1960년대 중반까지 공동으로 화전을 일구어 거기서 난 수확물을 팔아 교무금을 충당하고 공소 운영 기금으로 사용했다. 공소가 낡으면 3㎞ 떨어진 약사전까지 가서 벌목해 인력으로 운반해 공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새점터공소 마당에 설치된 야외 십자가와 예수성심상. 야외십자가는 2015년 화요일아침예술학교 고 홍문택 신부가, 예수성심상은 가톨릭조형미술연구소 송한흠 대표가 기증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이상 지금도 실현돼
공소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새점터공소는 이렇게 교우들의 희생적 나눔과 주변 교우들의 사랑으로 꾸려졌다. 제대와 제대 십자가, 종, 예수성심상, 야외 십자가 등 모든 것이 사랑과 나눔으로 이룬 기적이다. 마치 복자 신태보와 40여 명의 순교자 유족들이 처음 풍수원에 정착해 그렇게 살았듯이 새점터공소에서는 감실에 모신 성체를 중심으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이상이 지금도 실현되고 있다.
“여기 이 산골에는 그리스도 순교자들의 자손들이며 하느님의 착한 자녀들인 사람들이 독기 있는 숨결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오히려 도시에서보다도 더 성실한 외교인들이 나무로 만든 그들의 우상을 부수고 이제까지는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하느님을 엎디어 경배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죽고, 가난과 고통과 질병을 차분한 용기로 참아 받는 열심한 교우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초대 풍수원본당 주임 르 메르 신부 1890년 보고서 중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