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구 감곡본당 상평공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감노로 331-9에 자리하고 있다. 감곡(甘谷)은 남한강 지류인 청미천(淸渼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과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으로 구분돼 있지만, 조선 후기까지는 이 지역을 통칭해 ‘장호원’(長湖院)이라 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청미천 동쪽 충청북도 감곡 지역은 충주군 거곡면 장대리(장터)와 왕대리 등지였고, 서쪽 장호원 지역은 경기도 음죽군 남면 장호원리였다.
이후 거곡면의 장대리와 왕대리 지역이 1906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음성군에 편입됐다. 그리고 1914년 거곡면과 감미곡면이 합해져 ‘감곡면’으로, 장대리와 왕대리 등이 통합돼 ‘왕장리’로 바뀌었다. 감곡성당이 자리한 거곡면 왕장리 지역이 한국 천주교회 교세 통계에 초기 ‘충주 장호원’으로 표기되다 1906년 이후 ‘음성 장호원’으로 나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상평 고을
감곡면 중남단에 위치한 상평리는 상촌(桑村)의 ‘상(桑)’자와 성평리(城坪里)의 ‘평(坪)’자를 따온 이름이다. 상평리는 본디 충주군 감미곡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된 후 1914년 덕동, 성평리, 상촌리, 공산리, 외주리 일부 지역이 병합돼 감곡면에 편입됐다. 뽕나무가 많아 상촌이라 했던 이곳은 안동 김씨 김진강공파의 집성촌이다. 지금은 뽕나무보다 복숭아나무가 더 많은 곳이다. 상평리는 차령산맥 지맥인 해발 200~300m의 원통산 줄기 가사바위 밑 작은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상평공소가 자리한 마을은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또 가미실 계곡을 따라 발원한 물이 주천저수지로 흘러들어 비옥한 농경지를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고을이다.
상평공소 이야기에 앞서 감곡성당의 6ㆍ25 전쟁 수난기를 잠시 살펴보자.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4일 여주에서 감곡 방향으로 공산군이 쳐들어왔다. 장호원 지역을 점령한 공산군은 감곡성당을 임시 지휘소로 사용했다. 유엔군이 성당을 폭격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공산군들은 전투 중에 사용할 방공호 구축 작업과 의용군 강제 모집을 위한 대책 등을 성당 안에서 협의했다. 공산군은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에 일곱 발이나 총질을 해댔지만 부수지 못했다. 총탄을 입은 루르드 성모상은 이후 ‘공산군에 의해 수난당한 성모상’이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성당에 모셔져 있다. 감곡성당은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는 국군 부상병들을 위한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다.
6ㆍ25 전쟁 휴전 직후 신앙 공동체 생겨
휴전하자 제5대 감곡본당 주임 박고안 신부는 본당 재정비의 첫걸음으로 중단됐던 성체현양대회를 다시 열어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교우들을 위로했다. “충북 장호원본당에서는 성체 첨례 7부인 6월 10일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본 지방은 물론이요 안성읍, 이천읍, 충주읍 등 이웃 본당으로부터 여러 단체가 모여 약 4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체 거행이 진행되었는데, 안법고등학교 악대의 주악이 이채를 띠었다.
“연래대로 전날 밤에는 성가를 봉창하는 제등 행렬이 매산을 돌았고, 당일에는 근 4000명의 화려한 거동 행렬이 그 산을 돌아내려 성황을 이루었다. 바로 성당 위에 있는 이 매산은, 조촐한 장호원 시가를 위압하고 있어 시민들은 이 장엄한 행렬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만큼, 성체 거동의 선전 가치는 한국 제일이라 할 수 있다. 장호원본당에서는 지난 부활 때 약 100명 영세 입교하고서도 현재 본당과 각 공소를 통해 예비교우가 1000명을 돌파하고 있다.”(경향잡지 45권 1024호 1953년 7월호)
상평공소는 휴전 직후 이상근(힐라리오)ㆍ윤 요안나 가정이 상평리 동리로 이사를 오면서 시작됐다. 열심한 구교우인 이 가정은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면서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이 안나와 함께 동네 사람들을 전교했다. 이후 감곡본당 이강준(요셉) 전교회장이 상평으로 와서 적극적으로 선교해 교우 수가 점차 늘어났다. 이에 제7대 감곡본당 주임 이심 야고보(J.H. Ray,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가 1955년 상평공소를 설립했다.
공소는 설립됐으나 여전히 이상근씨 가정에서 공소 예절을 했다. 그러다 1963년 제9대 감곡본당 주임 안길모 신부가 상평리 지역에 17.5평의 건물을 사들여 공소로 사용했다.
1996년 단층 붉은 벽돌집 공소 재건축
상평공소는 제18대 감곡본당 주임으로 장인산 신부가 부임하면서 새 전기를 맞는다. 당시 감곡본당 관할 7개 공소 가운데 가장 낡고 협소했던 상평공소는 장 신부의 결단으로 신축에 들어갔다. 벽돌 한 장 값이라도 보태겠다는 교우들의 협조로 상평공소는 1987년 9월 11일 공사를 시작해 3개월 만에 완공했다. 당시 상평공소 지역에 한 도인을 따르던 무리가 있었는데 그 도인이 죽자 무척 방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곡본당과 상평공소 교우들이 그들을 전교해 상당히 많은 이에게 세례를 줬다. 이처럼 상평공소 교우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전교에도 적극적이다.
상평공소는 1996년 1월 말 대지면적 661㎡, 연건평 92.5㎡의 단층 붉은 벽돌집 공소를 지어 신앙의 못자리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