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35.청주교구 감곡본당 문촌공소
청주교구 감곡본당 문촌공소는 본당 설립 이전인 1888~1889년께 세워진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문촌공소 전경.
청주교구 감곡본당 문촌공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가곡로 531에 자리하고 있다.
문촌(文村)은 문암리의 ‘문’(文)자와 신촌리의 ‘촌’(村)자 각 한 자씩을 따서 지금의 이름이 됐다. 문촌은 본디 충주군 거곡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암리(文岩里)ㆍ신촌리(新村里)ㆍ상오리(上梧里)ㆍ장평리(壯坪里)ㆍ판요리(板腰里)를 병합해 문촌리라 칭하면서 음성군 감곡면에 편입됐다. 문촌리는 감곡면의 동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문촌공소의 우리말 옛 이름은 ‘늘거리’였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주민들은 마을이 ‘산이 없어 평평한 모양이 마치 관(늘-널의 충청도 사투리)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늘거리를 한자 이름으로 ‘판요 마을’이라 불렀는데, 판(版)은 널빤지를, 요(腰)는 허리를 뜻해 늘거리는 ‘허리쯤에 자리 잡은 평평한 마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20세기 초반에는 늘거리공소를 ‘판요공소’와 혼용해 사용하기도 했다.
감곡본당 문촌공소 뜰 안에 마련돼 있는 성모동산.
1888~1889년 풍수원본당 관할 늘거리공소로 출발
풍수원본당 초대 주임 르 메르 신부가 1888년 가을에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충주ㆍ제천ㆍ청주ㆍ괴산 지역 공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1888~1889년 풍수원본당 교세 통계표에 오늘날 문촌공소인 충주 늘거리공소를 신설했고, 교우 수는 143명이라고 밝히고 있다.(「청주교구 50년사 1」 211쪽 표2 참조) 따라서 감곡본당 문촌공소는 1888년 또는 1889년 풍수원본당 관할 공소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늘거리공소는 설립 당시 교우수로 볼 때 1883~1884년에 설립한 ‘숭선공소’(오늘날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와 통합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1892년~1893년 마르탱 신부에 의해 늘거리와 숭선공소가 다시 분리됐기 때문이다. 1896년 장호원본당(오늘날 감곡본당) 설립 당시 1894년~1896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늘거리공소 교우 수는 13명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초기 문촌공소는 그렇게 큰 신앙 공동체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탱 신부는 늘거리공소가 ‘우수한 공소’라고 평가했다.
장호원본당이 설립되면서 늘거리공소 교우 수는 급속히 늘었다. 1901~1902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59명이나 됐다. 장호원본당 교우들은 신심 깊은 열심한 교우들이었다.
“새 교우들은 대부분 신앙을 찾아 교우촌에 온 정직한 외교인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하느님의 품속으로 들어온 어린 양들입니다. 이 신입 교우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교우로서 지녀야 할 정신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제가 그들을 위해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교우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에 참여하기 위해 주일마다 10~20리(4~8㎞) 길을 걸어왔습니다.… 많은 교우가 대사를 받기 위해 장호원에 직접 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50~100리(20~40㎞) 심지어 170리(67㎞)를 걸어왔습니다. 교우 3명은 대사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인 주님 성탄 대축일에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장호원까지 왔습니다. 전날 밤 비가 내린 후 얼어붙은 길을 더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추위도, 피곤함도, 어둠도, 빙판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 세 여인이 빙판길을 오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오직 천사들만이 알 것입니다. 발이 피투성이가 되고 꽁꽁 얼어버린 채 그들이 장호원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틀 무렵의 시각이었습니다. 갖은 고통을 다 이겨내고 장호원에 도착한 그들에게 또 한가지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밤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밤미사에서 기도를 청했을 은총보다 훨씬 큰 은총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장호원본당 초대 주임 부이용 신부 ‘1902년 충주 지역에 관한 연말 보고서’ 중에서)
줌말 옹기장이 5~6가정 교우들이 공소 뿌리
감곡본당 교우들의 신앙은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에 기초했다. 문촌공소 교우들은 지금도 해마다 감곡본당 성체 현양 대회 때면 상평공소 교우들과 함께 성당 입구 ‘솔문’을 만들어 교우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늘거리 줌말에서 옹기를 빚어 생계를 유지하던 황씨, 박씨 등 5~6가정 교우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한 것이 문촌공소의 뿌리가 됐다. 문촌공소는 1960년대 이후 윤종학(바오로)ㆍ권택수(프란치스코)ㆍ황승구(요셉)ㆍ권덕수(요셉)ㆍ이등림(윤일 요한)씨가 공소 회장직을 번갈아 맡아가면서 공소를 발전시켜 왔다. 이들 공소 회장들은 지금의 공소 자리에 새 공소를 짓고, 성모상을 기증받아 성모동산을 꾸몄다. 또 도로변 공소 입구부터 공소 현관까지 포장하고 낡은 공소 지붕과 외벽을 교체했다. 수십 년간 외교인 명의로 돼 있던 공소 대지를 갖은 노력 끝에 청주교구 재단 명의로 이전하기도 했다. 이들 공소 회장들은 또 솔선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많은 이를 전교시켰다. 특히 이등림 회장은 30명이 넘는 이들을 입교시켰다.
문촌공소 교우들은 감곡본당의 영적 뿌리인 성체와 성모 신심에 기초해 열심한 신앙인들이다. 공소 제대 뒷벽에 설치된 예수성심상과 루르드 성모상이 이를 잘 드러낸다.
제단과 회중석 경계 없이 간결하고 단순
문촌공소는 장방형 단층 붉은 벽돌집이다. 입구 뾰족지붕 위에 십자가를 설치해 가톨릭 공소임을 드러내고 있다. 내부는 간결하고 단순하다. 제단과 회중석을 나누는 경계도 없다. 제대가 곧 제단이다. 제대 뒷벽 중앙에는 나무 십자가가 있고 양편으로는 예수성심상과 루르드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두 성상은 루르드 성모님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고, 해마다 성체 현양 대회를 열고 있는 감곡본당과 신앙 안에서 연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