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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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후손들이 믿음의 씨앗 뿌린 교우촌

[공소(公所)] 37. 청주교구 음성본당 보천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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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음성본당 보천공소는 광주 반씨 집성촌에 자리한 공소이다. 보천공소 전경.

 


순교자 남종삼 성인 후손 다섯 가족 정착

청주교구 음성본당 보천공소는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로 57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음성읍 지역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성 남종삼(요한)의 후손인 남영원, 남해원, 남창원, 남상오, 남석근 다섯 가족이 박해를 피해 음성읍 남멸 새터말 찬샘뜰(현 음성읍 신천리)에 피신해 신앙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장호원본당(현 감곡본당) 초대 주임 부이용 신부는 순교자 남종삼의 후손이 이곳에 정착한 것을 알고 1901년 찬샘뜰공소를 설립했다. 남석근은 신앙심이 깊고 전교에도 열심이어서 괴산 고마리와 보천 일대를 다니며 선교를 했다.

 

성 남종삼 요한


“일제의 탄압은 이곳 작은 마을까지 손을 뻗쳤다. (부이용) 신부님이 다녀가시면 일본 순경들이 찾아와서 무엇을 했느냐, 누구누구가 모였느냐 등등 조사를 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이 빼놓지 않고 조사하는 것은 일본 국기를 걸어놓고 일본 국가를 먼저 불렀느냐는 것이었다. 임 신부님은 외국인이었지만,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본 국기를 걸어놓지도 못하게 하고 일본 국가도 절대로 부르지 않았다. 어떤 때는 순경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몰래 미사를 드릴 때도 있었는데 그 다음 날이면 시아버님 남석근이 붙들려 가서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그런 박해가 심할수록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더욱 깊어갔다.”(남석근의 며느리 백 체칠리아 증언, 「음성본당 50년사」, 59쪽)

아울러 제3대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찬샘뜰공소 출신이다. “겨울이면 내일 새벽 미사를 가기 위해 대야에 세숫물을 미리 떠다 방 윗목에 두고 잤다. 그렇게 해서 새벽에 일어나 보면 물이 꽁꽁 얼어 있어 얼음을 깨서 세수하고 집을 나서면 신천리 개울 다리도 빙판이 되어 미사에 늦지 않으려고 애간장을 태웠다. 열살 남짓한 어린이가 서울 성신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6년 동안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미사에 참례하고 복사를 하는 열성과 인내심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장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음성본당에서 첫 미사를 드릴 때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외조모님은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장 주교 댁에서 살았는데 식사 시간 외에는 누워서 사셨다. 더구나 치매기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새벽에 눈을 뜨면 방으로 떠다 드린 물로 양치와 세수를 하고 그때부터 묵주기도를 시작하면 하루종일 기도로 사셨다. 오직 하나 첫 외손주가 훌륭한 신부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큰소리로 있는 힘을 다해서 드렸던 것이다.”(「음성본당 50년사」, 112~113쪽)

 

1958년께 설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천공소는 지금도 공소 교우들이 늘어날 만큼 신앙적으로 활기찬 공소이다. 깔끔하게 단장한 보천공소 내부.


신앙심으로 전쟁으로 입은 상처 치유

찬샘뜰공소에 이어 음성읍 읍내리 점말에 공소가 설립됐다. 점말은 옹기점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6ㆍ25 전쟁 당시 음성 지역은 감우재 전투로 쑥대밭이 됐다.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생겨났다. 점말공소 교우들은 9ㆍ28 수복 이후 피난 갔다 돌아와 다시 공소 예절을 하면서 전쟁으로 상처 입은 주민들을 신앙심으로 치유했다. 특히 점말공소 청년들이 나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많은 새 영세자를 배출했다.

점말공소 교우들의 헌신적 삶을 들은 메리놀외방전교회 파지(J.V. Pardy) 신부가 음성을 방문해 본당 설립을 구체화하고, 1953년 충청북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자 가장 먼저 1954년 음성본당을 신설했다. 이렇게 박해 시대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믿음의 씨앗을 뿌려 싹튼 음성본당은 한민족끼리 벌인 전쟁의 상처를 신앙으로 치유한 교우들의 희생적 선교 열의로 든든히 뿌리내렸다.

 

음성본당 보천공소는 공소 앞마당과 뒷마당 양쪽에 성모상을 세워두고 기도할 만큼 성모 신심이 깊다.


광주 반씨 집성촌에 보천공소 설립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는 광주 반씨의 집성촌이다. 조선 중기 영춘현감(永春縣監) 때 선정을 베푼 반석권이 보천리 개미산에 입향하면서 광주 반씨의 세거지가 됐다.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가 이곳 보천공소 출신이다.

음성본당 설립 후 보천 지역 전교는 1956년 연구희(요한)가 맡아 했다. 이후 음성본당 보좌 하 원선시오 신부와 호순성(베드로) 전교회장이 마을 사랑방을 빌려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보천공소는 1958년께 설립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1958년 6월 말 음성본당 통계에 6개 공소에 교우 수 1252명이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 6개 공소는 보천ㆍ소이ㆍ야동ㆍ불정ㆍ소여ㆍ덕생공소다.

보천공소 초대 연기남(바오로) 회장 부부의 열성적인 전교 활동으로 많은 영세자가 배출됐다. 그래서 음성본당 제2대 주임 구 제라르도(G.F. Kennedy) 신부가 1960년 7월 공소 대지를 매입했고, 1963년 3월 교우들이 직접 흙벽돌을 찍어 지은 공소 건물을 봉헌했다. 1979년 3월 충북선 철로 복선화 사업으로 공소 대지가 철로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공소를 철거하고 원남면 옛 면사무소 땅 282.64㎡를 매입해 지금의 보천공소를 지었다.

1979년 4월 제2대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한 보천공소는 1986년 8월 전면 보수를 했다. 이후 2003년 6월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했다. 보천공소는 193.4㎡(58평) 규모의 시멘트벽돌 건물로 지붕은 기와로 마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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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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