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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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문산 교우촌에 숨어 살다 감곡으로 내려와 일군 형제 공소

[공소(公所)] 44.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진흥공소·옥단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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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진흥공소는 회문산 교우촌에서 성 김대건 신부 동생인 김난식(프란치스코)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방흥석(안드레아)이 이주해와 설립한 유서 깊은 공소이다. 1977년 지어 봉헌한 진흥공소 전경.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甘谷面)에는 공소 2곳이 있다. 진흥리(眞興里) 진흥공소와 유정리(儒丁里) 옥단공소이다.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관할 진흥공소는 감곡면 석점1길 43-1에, 옥단공소는 감곡면 옥신2길 17에 자리하고 있다. 감곡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태인군 감산면(甘山面), 사곡면(師谷面), 은동면(銀洞面)을 합해 감산의 감(甘), 사곡의 곡(谷)자를 따서 ‘감곡’이라 했다.

진흥과 옥단은 형제 공소이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 때 회문산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교우촌을 이루고 숨어 살던 교우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감곡면으로 내려와 조성한 공소가 진흥과 옥단이다.
 
진흥공소 교우들은 옹기를 구워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신앙생활을 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공소 내부이지만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신앙의 자유 얻고 감곡면에서 두 공소 조성

회문산으로 숨어든 교우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이가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난식(프란치스코, 1827~1873)과 재당질인 7촌 조카 김현채(토마스, 1825~1888)이다. 김난식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선종한 후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회문산으로 들어와 독신으로 화전을 일구고 토종벌을 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또 김현채는 부인 강 막달레나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하느님만을 충실히 섬겨 신앙인의 본보기가 됐다. 이들의 모범적 신앙의 삶이 교우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교우 하나둘씩 회문산으로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렇게 회문산 일대에 생겨난 공소가 58개나 됐다. 신태인본당의 모태인 능교공소도 회문산 교우촌에서 내려온 교우들이 형성한 신앙 공동체다.

뮈텔 주교가 사목 방문해 1924년 10월 능교성당 축복식을 거행할 무렵 감곡면에 내려와 교우들이 살게 됐다. 진흥리에 처음으로 이주한 교우는 정읍 삼바실에 살던 방흥석(안드레아)이다. 그는 진흥리에 오기 전에 한때 회문산 교우촌에서 김난식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방흥석이 박해가 끝나고 진흥리에 오게 된 것은 친척들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옥단공소는 진흥공소와 형제 공소로 회문산 교우촌에서 이주한 김봉석(베드로)의 전교로 가톨릭 신앙을 싹 틔운 곳이다. 감곡면 옥단공소 전경.


진흥리에 자리 잡고 옹기 구워 팔며 전교

방흥석이 진흥리에서 자리 잡은 곳은 석점(石店)이다. 구릉 지대에 자리한 이곳은 땅이 좋아 예로부터 옹기를 굽던 곳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조차 석점이 됐다. 방흥석도 이곳에 정착해 옹기를 구워 팔았다. 박해 시기나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직후 천주교인들이 생업으로 옹기점을 선택한 이유는 특별한 시설이나 자본 없이 기술과 진흙만 있으면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옹기점 자체가 군역(軍役)이나 잡역(雜役)에서 면제받는 제역촌(除役村)이어서 천주교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그나마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옹기 마을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에 공생, 공존하던 교우촌에 가장 알맞은 생활수단이었다.

방흥석은 옹기점을 하면서도 전교에 힘썼고 그 결과 석점에 교우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후 방흥석의 옹기점을 인수한 신용운(베드로)이 진흥공소 회장이 돼 더욱 전교에 힘써 판공과 대축일 때에는 이웃한 옥단공소 교우들이 첨례를 지내기 위해 진흥공소로 올만큼 성장했다.

진흥공소는 1977년에 지어졌다. 대지 150평에 건평 50평의 아담한 벽돌 건물이다. 가난한 교우들은 공소를 짓기 위해 형편에 따라 공사 기금을 분담했고, 신태인본당의 도움으로 숙원사업이었던 공소를 완공해 그해 9월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후 1989년 공소 바닥을 마루로 개조하고 지붕을 높이는 등 공소를 보수했다.
 
옥단공소와 진흥공소는 형제 공소로 공소 내부마저 닮아있다.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단장된 옥단공소 내부.


김봉석이 이주하며 옥단공소 터전 일궈

감곡면 유정리 옥단 마을에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공소를 이룬 것은 1925년께 회문산 교우촌에서 살던 김봉석(베드로)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다. 김봉석 역시 옥단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회문산에서 김난식과 한 교우촌에서 생활했다. 그가 옥단에 와서 살게 된 동기는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다.

김봉석은 옥단에 살던 친척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에 힘썼다. 옥단은 구릉 지대인 진흥리 석점과 달리 호남평야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농촌이다. 주민들이 유교 풍습과 미신에 젖어있어 전교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봉석은 수류본당 전교회장을 모셔와 선교를 할 만큼 열성을 보여 공소 터전을 이뤘다. 김봉석은 자신이 입교시킨 초기 교우들과 함께 판공과 대축일 때에는 14㎞ 떨어진 수류성당까지 걸어가서 미사에 참여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주일이면 자신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공소 예절을 했다.

옥단공소는 1954년 진흥공소와 함께 정식 공소로 설립됐다. 공소 회장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던 교우들은 1985년 공소 건물을 짓기로 뜻을 모으고 건축 기금을 모아 가옥 2채를 매입했다. 옥단공소 교우들은 형편에 따라 가구마다 쌀 1가마에서 6가마까지 건축 기금으로 냈다. 2년 후 1987년 4월 매입한 집 2채를 허물고 대지 400평에 53평 규모의 공소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공소를 완공, 박정일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했다.

이처럼 정읍시 감곡면의 신태인본당 진흥공소와 옥단공소는 100년 가까이 형제 공소로서 꾸준히 가톨릭 신앙을 꽃피우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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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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