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김 신부 2000년 파견, 몽골 선교사로 23년간 헌신
몽골인이 사랑한 한국인 선교사제, 몽골 교회의 아버지로 불렸던 고 김성현 신부 1주기 추모 미사가 5월 24일 대전 정하상 교육회관에서 교구장 김종수 주교 주례로 유가족·교구 사제단이 참여한 가운데 거행됐다. 미사 전 사제단과 신자들은 김 신부의 몽골 선교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초원의 바람’을 시청하며 그의 투철했던 선교정신과 사랑의 마음을 눈물로 기렸다.
몽골 교회는 1992년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 수도회 선교사 3명이 파견되며 시작한 보편 교회의 가장 작은 교회다. 그해 한국 주재 교황대사가 몽골 주재 교황대사를 겸하게 됐고, 대전교구는 1997년 한국 교회에서 처음 몽골에 ‘피데이도눔’(「신앙의 선물」, 교구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교황 비오 12세 회칙)을 시작하면서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신자 수 1500여 명으로 성장한 몽골 교회의 중추 역할을 한 대전교구. 그 중심에 김 신부가 있었다.
1998년 사제품을 받은 김 신부는 2000년 몽골 선교사로 파견됐다. 당시 나이 33세였다. 그는 몽골행 비행기 안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나이로 생각하며 이제까지의 시간은 오늘 죽고, 몽골에서 부활하겠다는 묵상을 했다”고 했었다. 그 다짐은 지난해 선종 순간까지 23년간 오직 몽골인과 몽골 교회만을 위해 헌신한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몽골 선교 장상으로부터 본당 신설 및 사목 제안을 받은 김 신부는 성전 건립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묵주 기도 8만 단 바치기 운동을 했다. 그렇게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항올 성모승천성당이 건립됐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성당 문을 활짝 열었다. 프라도 사제회 회원이었던 김 신부에게 가난은 늘 사목의 첫 자리였다. 아울러 거리를 맴도는 아이들을 거둬 함께 지냈다. 몽골 교회가 처음 배출한 사제도 김 신부가 만난 아이 중 한 명이다.
이후 울란바토르에서 200㎞ 떨어진 에르데네산트의 초원 지역으로 이주해 유목민들과 함께 전통 천막 게르에서 생활하며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김 신부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 시간이다. 김 신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자처했던 건 연민 때문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주고받는 것을 사랑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몽골인들은 그런 김 신부를 하나같이 ‘아버지’라고 했다.
김 신부의 이런 모습은 교회도 필요로 했다. 몽골 울란바토르 성 베드로와 바오로 주교좌본당 주임과 총대리 직책이 주어졌다.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김 신부는 교회의 부름에 응답했다. 김종수 주교는 이날 추모 미사 강론에서 “그런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람이요, 동시에 진정한 교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추모했다.
김 신부는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몽골 사목 방문 전 총대리 직무를 수행하다 하느님 품에 안겼다. 교황은 김 신부의 이름을 언급하며 선교사로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렸다.
미사에 참여한 김 신부의 둘째 누나 김선임(클라라)씨는 “신부님은 어릴 때부터 착한 생각이 남달랐다”며 “가족 중 막내였지만, 영적인 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신부님이 남기신 가난의 아름다움을 잇기 위해 매달 몽골에 후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이튿날 몽골로 넘어가 선종 당일인 5월 26일 몽골 울란바토르지목구장 조르조 마렌고 추기경과 김 신부의 묘지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