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며 생명사상을 일깨우고 떠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요한, 1928∼1994) 선생<사진>. 선종 30주기(5월 22일)를 맞아 그가 태어나고 활동한 원주를 중심으로 포럼과 특강 등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상봉(이시도르) ‘가톨릭 일꾼’ 편집장이 최근 「장일순 평전」을 펴냈다.
“10여 년 전 의뢰받았지만, 장 선생의 그릇이 너무 크고 가늠하기 어려워 오래 물러나 앉아있었다”는 한 편집장의 말처럼, 장일순 선생이 뿌린 씨앗은 수많은 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 선생은 고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의 시작을 함께하며 방향을 설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먼저 교회 자립운동을 시작했고, 꾸르실료에 기반을 둔 평신도 중심의 교회 쇄신운동을 일으켰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던 장 선생은 공의회 문헌과 「지상의 평화」 등 교황 회칙을 읽고 번역해 평신도들과 나눴다.
원주 가톨릭센터 건립에도 문화적 안목으로 힘을 보탰다. 센터 첫 공연작인 ‘금관의 예수’ 작곡가가 요즘 다시 뜨겁게 조명받고 있는 ‘뒷것’ 김민기씨다. 김민기씨가 아버지로 여긴 사람이 장일순 선생이다. ‘뒷것의 아버지’, ‘뒷것의 뒷것’인 셈이다.
장 선생은 이외에도 신용협동조합의 기틀을 마련했고, 대성학교 설립과 민주화 운동·강원 지역 재해대책사업에 나서는 등 굵직한 일들을 도맡았다. 1980년대부터는 ‘한살림’ 운동을 통해 생명사상을 전개했다. ‘걸어 다니는 동학’이라 불릴 만큼 동학사상에 심취한 장 선생은 가톨릭적 기반 위에서 동학의 언어로 생명사상을 펼쳤다. 그에겐 선악의 경계가 없었다. ‘조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할 만큼 모든 생명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했다.
이런 장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보다 대부분 주변 지인들과 평범한 시민들의 증언으로 이어내려 오고 있다.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솔직하면서 남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던 장 선생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길 극히 꺼렸지만, 선종 당시 3000여 명이 조문하며 그를 기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사람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지은 ‘무위당’(无爲堂)이란 호가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다.
한 편집장은 “SNS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까지 공유하는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는 ‘뒷것’들이 관심받는 이유는 화려한 겉모습에 감춰진 내면의 허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면서 “그것은 신앙적으론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일깨우는 일이며, 장 선생이 한평생 추구했던 삶, 그리스도를 따른 삶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