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과 함께 복음의 정수를 살고자 했던 고(故) 정일우 신부(John Vincent Daly, 1935~2014)의 메시지가 선종 10주기를 맞아 다시금 화두로 대두됐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8일 ‘정일우의 자리, 정일우의 시간’이란 주제로 10주기 추모행사를 열고, 정 신부가 펼치고자 했던 ‘가난’과 ‘공동체’ 정신을 되새겼다.
행사에서는 김동원(프란치스코) 감독이 제작한 다큐 ‘내 친구 정일우’를 시청하고, 정 신부의 평생 동지였던 고(故) 제정구(바오로) 의원의 부인 신명자(베로니카) 복음자리 이사장과 전주희(예수회) 수사, 조현철(예수회) 신부가 참여해 가까이에서 본 정 신부의 모습을 나눴다.
미국 예수회 출신 정 신부는 한국에서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73년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간 정 신부는 그곳에서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함께 양평동 판자촌생활을 시작으로 복음자리·한독주택·목화마을을 차례로 건립했다. 정부의 살인적인 철거정책에 내몰리는 철거민 곁을 지킨 것도 그였다. 신명자 이사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게 철거한 나라로 알려졌고, 200만 세대가 철거되며 정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며 “정 신부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주거 정책이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 신부가 바란 건 ‘가난’ 그 자체였다. 텐트마저 모두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더 가난해졌다. 잘된 일이다. 더 이상 빼앗길 게 없다. 하느님 힘이 더 크게 드러날 것”이라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지붕 없는 땅에서 함께 잠을 잤다. 그가 가진 위트와 친근함에 복음의 가치가 더해져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고 김수환 추기경의 고해사제였던 정 신부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구원한다”고 늘 강조했다.
전주희 수사는 정 신부의 일화를 전하며 가난의 가치를 상기시켰다. “정 신부님이 괴산에서 유기농 농사를 지을 때 상품은 좋은데 팔 곳이 없어 굉장히 힘들어했습니다. 매일 밤 사람들이 신부님 농장에 모여 술 먹고 위로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됐어요. 그러다 한살림 공동체가 괴산 상품을 알아보면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유해지니까 공동체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수사는 “가난이 죄악시되기까지 하는 지금, 화려한 교회 모습을 바라본다”며 “가난이 교회 공동체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밝혔다.
박문수(예수회) 신부는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정 신부만의 영성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따로 없었다는 점”이라며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사람들이 요청하는 곳이 곧 정 신부가 있는 자리와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조현철 신부는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은 밑에서부터 연대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며 “가난하게 살 때 비로소 연약한 생명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