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샤넬 성인은 1803년 7월 12일 프랑스 동부 앵 지역의 벨레교구에 속한 퀴에의 한 농장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목동으로 일했던 베드로는 12세 무렵 한 교구 사제의 설득으로 부모에게 허락을 받고 작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경건함과 총명함을 지녔던 그는 1817년 첫영성체를 하고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6세 때인 1819년 멕시미외의 소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한 뒤 부르의 대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교육 과정을 마치고 1827년 7월 15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1831년 장 클로드 콜랭 신부가 외방 선교를 위해 프랑스 리옹의 신학생들과 함께 설립한 마리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해 5년 동안 벨레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6년 신설된 리옹의 마리아 선교 수도회를 인준하면서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선교활동 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또 오세아니아주 대목구를 선교지로 위임했습니다. 그해 베드로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장 밥티스트 퐁팔리에 주교가 선교를 위해 구성한 소규모 팀에 참여해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로 파견됐습니다.
당시 폴리네시아 여왕은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이자 상인인 영국 영사의 반대를 두려워해 그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평수사 1명과 통역에 능통한 영국인 평신도와 함께 1837년 11월 12일 타히티 섬 서쪽에 있는 푸투나 섬에 정착했습니다. 당시 푸투나 섬은 피지 섬 근처에 있는 프랑스령으로, 공공연히 식인(食人) 풍습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5년 동안 생활했는데, 처음 2년 동안은 큰 어려움 없이 선교하며 일부 섬 주민을 개종시키고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등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 현지 언어를 배워 익히면서 점차 주민들의 신임을 얻었으나 제사장을 겸하는 추장의 질투와 견제를 받게 됩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추장의 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려고 하면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3년 만에 섬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남아 버텼습니다. 그러다 1841년 4월 28일 추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죽어가면서도 모두를 용서하면서 섬 주민에게 큰 감동을 남겼습니다. 베드로가 사망한 뒤 그에 대한 섬 주민의 사랑과 존경은 개종의 물결로 이어졌고, 1843년 그들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됩니다. 베드로의 시신은 1842년 배에 실려 프랑스로 이송되었으나, 1977년 다시 푸투나 섬으로 돌아와 안치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마리아 선교 수도회의 첫 순교자이자, 푸투나 섬에서 순교한 오세아니아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이에 오세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