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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축조 당시 천주교는 서학(西學)이라 불려졌다.
이런 이유로 정약용이 방화수류정 서쪽 벽에 십자문양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방화수류정 지붕은 8각을 기본으로 십자형으로 만들어졌고, 천장을 받치고 있는 서까래 역시 십자가 모양이다.
나 신부가 순례객들에게 서쪽 벽 십자문양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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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강타한 폭설로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았던 8일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수원교구 수원성지(수원시 팔달구 소재, 전담 나경환 신부) 마당에 목도리와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을 한 신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목에 소형 스피커를 걸고 털모자를 눌러 쓴 한 남자가 신자들 앞으로 나와 수원성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로만 칼라가 아니었다면 전문 안내자로 착각할 정도로 말솜씨가 좋다. 수원성지 전담 나경환 신부다.
이날은 수원성지가 매월 첫째 주 금요일 밤에 실시하는 `달빛 순례`의 날. 나 신부가 직접 순례객을 이끌고 화성(華城) 곳곳을 안내하는 성지 안내자로 변신하는 날이다. 2000년 북수동성당을 중심으로 삼아 성지로 선포된 수원성지는 18세기 정조 임금이 세운 수원 화성 전체를 일컫는다.
순례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지 입구 근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10분쯤 걷자 화홍문이 보인다. 나 신부는 서학자였던 정약용(1762~1836)이 설계한 수원 화성(사적 제3호) 건축물 곳곳에서 신앙을 드러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홍문의 7개 수문은 성령칠은과 칠성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7은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화홍문 오른편에 있는, 순교자의 목을 매달아 놓았던 암문(暗門)을 지나 방화수류정 옆 연못 용연(龍淵)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박해시대 때 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북포루가 보인다.
"박해시대 때 순교자 가족들은 가족이 죽어도 장사조차 치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 눈을 피해 밤에 연못가로 나와 물위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며 죽은 가족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나 신부의 설명을 듣던 순례객들이 일순간 숙연해졌다. 순례객들은 촛불을 밝히고, 죽는 순간까지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수원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전구를 청했다. 이처럼 순례객들은 순교자들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달빛을 바라보며 기도를 바친다. `달빛 순례`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용연에서 한동안 묵상을 한 후 방화수류정에 올랐다. 방화수류정 서쪽 벽에는 86개의 십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십자가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난다. 화성 건축물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천주교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두 시간 가량 이어진 순례는 수원성지 마당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앞에서 수많은 유ㆍ무명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끝난다.
이날 순례에 처음 참가한 조민성(로사, 수원 지동본당)씨는 "수원에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면서 "순교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신심을 본받아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 신부는 "달빛 순례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 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빛 순례는 정해진 날에 계속된다"고 말했다.
달빛 순례는 매월 첫째 주 금요일 저녁 7시 반에 시작된다. 1월은 첫째 주 금요일에 대축일 미사가 있어 한 주 미뤄졌다. 순례객들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문의 : 031-246-8844, www.suwons.net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