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얄궂다. 사람들은 계속 궁금해한다. 그가 언제 무대를 떠날지. 정작 본인은 무덤덤하다.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토슈즈에 몸을 실을 뿐이다. "아직도 무대에 갈증 난다"는 말과 함께.
올해 마흔넷. 발레리노 이원국(도미니코, 부산 해운대본당, 노원 이원국발레단장)씨 나이다. 발레계에서 `서른다섯 살=은퇴`라는 건 하나의 불문율이다. 대부분 서른다섯 살 이전에 은퇴하지만, 설사 그때까지 버틴다 해도 무대에 서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씨는 이런 상식을 거부한다. 말이 아닌 몸으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22일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만난 이씨가 선보인 동작 `그랑제떼(grand jete, 앞으로 도약하는 점프)`는 젊은 무용수와 견줘도 손색없을 만큼 힘이 넘쳤고 가뿐했다. 균형 잡힌 동작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 국내 발레계의 첫 스타
그간 이씨 앞에 붙여진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국립발레단 스타 무용수로 1990년 말부터 한국 발레 르네상스를 이끌며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라 불렸다. 특히 그는 국내 발레계에 처음으로 `스타`의 개념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2000여 객석을 매진시키던 그다.
그의 공연만을 보러 다니는 `오빠부대`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씨 자신조차도 자신이 이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저는 늦깎이로 발레에 입문했어요. 부산 동명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20살 무렵에 처음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휴학을 밥 먹듯이 했어요. 6년간 고등학교를 다녔을 정도니 말 다했죠. 사춘기가 참 길었거든요. 그렇게 방황하고 있던 제게 어머니가 발레를 권하셨어요. 팔다리가 길쭉한 아들에게 잘 어울릴 만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 주님의 기도 바치며 연습 너무나 뜻밖이었던 어머니 김의정(살로메, 71)씨의 제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호기심으로 집 근처 발레학원에 등록한 그는 그야말로 `미친듯이` 발레에 빠져들었다. 이씨는 "그 어떤 것에도 오래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희한하게도 발레만은 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족들의 격려 속에 뜻밖의 재능을 찾아낸 이씨는 중앙대 무용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 발레리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선후배, 동기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자타공인 `연습벌레`였다. 옷 갈아입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연습복을 상시 입고 다닐 정도였다.
"보통 발레는 8살 무렵 시작하는게 정석이에요. 그에 비하면 저는 늦어도 한참 늦었잖아요. 늦은만큼 남들 갑절로 연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하루를 나흘처럼 쓰려고,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어요. 대학시절 낭만이라는 미팅 한 번 못해봤을 정도에요. 하지만 그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만약 제 스스로가 즐겁지 못했다면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거에요."
이씨는 잠깐이라도 몸이 가만히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발끝으로 몸을 들어 올리는 동작 `를르베(releve)`를 1000번씩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정도였다.
"를르베를 하면서 늘 기도를 바쳤어요.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성모송까지. 눈을 감고, 기도를 바치면서 연습에 몰두하죠. 그러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님께서 저를 지켜봐주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더라고요."
신심이 깊은 어머니 김씨의 권유로 중학생 때 세례를 받은 이씨는 매일 밤에 기도를 바치곤 했다. 특히 남들보다 늦은 출발로 마음의 짐을 늘 안고 지내던 그에게 기도만한 안식처는 없었다.
그는 "연습에 매달리며 앞만 보고 달려가던 제게 숨을 돌릴 여유를 안겨 준 것은 다름 아닌 기도였다"고 말했다. 또 지금까지 현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비결도 "끊임없는 가족들 기도와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총 덕분"이라고 자신있게 꼽았다.
그는 발레를 시작한 20살 때부터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늘 십자성호를 긋는다. 이씨는 "성호를 긋고 무대에 오르면 `준비완료`라는 신호가 내려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게 되곤 한다"며 자신을 지탱해준 원동력 한가운데 신앙이 버티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이런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연습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993년 `호두까기 인형`에서 처음 왕자 역을 맡은 이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치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0년 넘게 주역만을 맡았다. 그의 타고난 연기력과 넘치는 에너지, 신체적 조건은 한국 발레계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했다.
# 이방인에게 박수세례 그리고 1995년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무대가 허락됐다. 바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에서 키로프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왕자 역을 따내게 된 것. 동양인 발레리노로는 최초였다. 당시 무대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이씨는 "낯선 이방인에게 보내주는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세례 덕에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그 이후 그는 2000년 문화관광부 선정 `젊은 예술가상`과 2001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베스트 파트너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 발레리노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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