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건축에는 바실리카식과 함께 중요한 유형이 하나 더 있다. 중심형이다. 중심형 성당이란 건물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중심에 집중하여 구성된 성당을 말한다. 평면은 보통 원형, 8각형, 정사각형, 네 팔의 길이가 똑같은 그리스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중심형 성당은 로마의 산토 스테파노 로톤도에서 보듯이 기하학적으로 명쾌하고 완성도가 높다. 바실리카식은 후에 로마네스크 건축이나 고딕 건축의 바탕이 되었고, 중심형은 비잔티움 성당이나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주의 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며 많은 건축가의 창조력을 불러일으켰다.
중심형 성당은 평면의 특성상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그리 넓지 않다. 가장 중요한 제단과 제대가 중앙에 오는 중심형 성당에서는 제대 뒤의 절반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제단을 원형 평면의 끝에 놓으면 제단과 제대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중심형 성당은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크지 않아 많은 신자가 예배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중심형 성당이 그렇게 많이 지어지지 않았다. 중심형 평면을 사용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수용하려면 중심형에 장축형을 결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나스타시스 로툰다(Anastasis Rotunda)에 장축형을 붙인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이다.
중심형 건물은 세례와 장례라는 아주 특별한 두 경우에 널리 사용되었다. 세례나 장례에는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심형 평면에는 석관 또는 유해, 세례반 등 주목하는 중심이 공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게 하는 데 유리했다. 이런 이유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심형 건물은 사람의 죽음과 관련되는 시설에서 많이 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순교자 묘소(martyrium)인데 순교자나 세상을 떠난 성인의 유해 등을 건물 중앙에 안치했다. 세례는 이제까지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신자로서 다시 태어남을 뜻하므로 의미상으로는 죽음과 이어지는 건물이었다. 라테라노 세례당과 같은 중심형 세례당이 그러했다.
특히 순교자 묘소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교도의 영묘(靈廟, mausoleum)와 비슷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은 로마 건축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고대 로마에서 중심형 건축은 영묘였다. 더구나 고대 로마의 영묘는 단순한 묘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황제가 신이 되어 있음을 기념하는 무덤 사원(tomb temple)이었다. 이를 고대 그리스에서는 ‘헤로아(heroa, heron의 복수)’라고 했는데, 이는 전사(戰士)에게 바쳐진 사원이라는 뜻이었다.
공간의 수직성 이끌어낸 위대한 실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인간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하기 위해서 황제 영묘의 평면을 채택했다. 그리고 중심형의 ‘헤로아’를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을 기념하는 성당의 초점으로 만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신자들은 바실리카식의 홀로 수용하면서도, 땅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를 소중히 모시는 ‘헤로아이자 순교자 묘소(heroon-martyrium)’를 중심형으로 만들어 이 두 유형을 결합했다.
이는 특별한 죽은 이 또는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공경한 데에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러했듯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특별한 죽은 이는 인간 사회와 초자연적인 힘을 직접 이어준다고 여겨졌다. 이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 묘소를 특별한 죽은 이와 함께 공동 식사를 나누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와 가까이에 있음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여겼다.
중심형 건물에서 석조라면 천장은 반드시 돔이 되고, 목조일 때는 원뿔형이 되는데, 이러한 지붕 형상에서 안에서 미사를 드리는 신자들은 하늘을 연상했다. 육중한 피어가 받쳐주고 있는 저 높은 곳에는 드럼과 펜덴티브가 있고 또 그 위에 중심으로 이루며 얹혀 있는 돔은 바실리카에는 없는 강한 수직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이들의 눈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었다. 중심형 성당이나 세례당 등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공간의 수직성을 새로이 이끌어낸 위대한 실험이 되었다.
돔이라는 둥근 천장 얹은 가장 오래된 성당
로마 성벽 밖으로 약 3㎞ 떨어진 비아 노멘타나(Via Nomentana)라는 길옆에는 7세기에 세워진 성녀 아녜스 대성전(Sant‘Agnese fuori le mura)이 있다. 본래 이 자리는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도면의 회색)가 있던 곳이다. 그 땅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딸 콘스탄치아의 별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당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4세기에 지어진 같은 이름의 큰 대성전이 있었고 그것에 작은 영묘(도면 밑의 원형 건물)가 붙어 있었다. 콘스탄치아는 아버지께 요청하여 성녀 아녜스의 무덤 근처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에 성녀 아녜스 대성전을 짓고자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초기 자금을 대고 콘스탄치아가 작업을 감독하여 대략 335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대성전은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쇠락했고, 교황 호노리우스 1세가 같은 이름으로 지금의 대성전을 작게 지었다.
나병에 걸려 있던 콘스탄치아는 성녀 아녜스의 묘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이 나타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는 말씀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딸의 세례를 위해 원형 세례당을 세웠다. 그의 두 딸 콘스탄치아와 헬레나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딸 콘스탄티나가 354년 비티니아에서 사망하여 그녀의 시신은 그 세례당에 묻혔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아내였던 여동생 헬레나도 360년이나 361년 초에 갈리아에서 사망하고 이곳에 묻혔다. 그 후 이 영묘는 1254년에 산타 코스탄차(Santa Costanza) 성당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건물의 가장 깊은 곳에는 모작이기는 하나 석관이 놓여 있다.
이 성당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뛰어난 원형 건물의 하나이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돔이라는 둥근 천장을 얹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또한 4세기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주옥과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이기도 하다. 원형 구조물이 높이 올라가고 그 위로는 둥근 드럼이 있으며 그 위에 돔이 올라가 있다. 드럼에는 12개의 창이 뚫려 있으며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제대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과 공간 전체를 비추며 조용히 감싸준다.
두 개씩 쌍을 이룬 열두 쌍의 화강석 원기둥이 아치를 틀며 가운데의 지름 22.5m의 원형 구조물을 받치고 있다. 원통 공간 바깥쪽에 있는 볼트 천장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덮여 있다. 다만 돔의 모자이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프란체스코 돌란다(Francesco d’Ollanda)가 1540년에 완성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볼트 천장 밑에 있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중심 공간에서 나온 반사광이 이 모자이크에 겹치면서 시시각각 미묘한 빛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세례당이 영묘가 되고, 다시 중심형의 작은 성당으로 바뀐 산타 코스탄차 성당. 말없이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몸과 공간이 하나가 되어 마음을 드높여 주는 중심형 성당 공간의 정수(精髓)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