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9. 하기아 소피아 <상>
하기아 소피아 내부. 출처=Piotr Redlinski
하기아 소피아 외관. 출처=Burak Kara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튀르키예어로는 아야 소피아(Ayasofya), 라틴어로는 상크타 소피아 또는 상크타 사피엔자(Sancta Sophia, Sancta Sapientia)다.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라 부르는 것은 325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새 수도를 옮기고 라틴어가 아닌 고전 그리스어로 불렀기 때문이다. ‘거룩한 지혜’라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5)
하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에 있는 중요한 비잔티움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의 하나다. 이것은 6세기(532~537) 유스티아누스 1세 때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에 건설된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졌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선 아름다운 성당의 둥근 지붕은 도시 경관의 중심이었다.
360년경에서 1204년까지는 정교회 대성당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많은 비잔틴 모자이크가 베니스로 옮겨졌고 1261년까지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 다시 1261년에서 1453까지는 정교회 대성당이었다. 그러다가 1453년에서 1934년까지는 모스크로, 1935년에서 2020년까지는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2020년부터는 다시 모스크가 되었다. 이렇게 하기아 소피아는 수 세기에 걸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가 있는 땅에는 본래 이교도 사원의 기초가 있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는 그 위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0년경에 짓기 시작하여 360년에 도시 최초의 대성당을 봉헌했다. 지붕을 목재로 짠 일반적인 바실리카식의 성당인 마그나 에클레시아(Magna Ecclesia, Great Church)였다. 그러나 이 성당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가 두 번째로 추방된 뒤, 잇따라 일어난 폭동 중에 발생한 화재로 404년에 손상을 입었다. 콘스탄스 1세는 이를 확대하여 두 번째 성당을 다시 지었고, 415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다시 봉헌되었다. 그러나 532년 1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대해 시민이 일으킨 1주일간의 니카(Nika, 그리스어로 ‘정복’) 반란으로 황제 궁전 일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함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다시 불타버렸다.
하기아 소피아 평면. 출처=Wikimedia Commons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변화 겪어
폭동을 진압한 지 불과 39일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도시를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완전히 새롭고 이전의 두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의 장려(壯麗)한 세 번째 성당을 짓고자 했다. 이번에는 화재에 잘 견디도록 불연화한 석조나 벽돌로 만들게 했다. 지금처럼 중랑(中廊)의 스팬이 33m나 되는 거대한 성당에서는 목조의 트러스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적조의 아치나 볼트, 돔의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아시아에서 온 안테미우스(Anthemius)와 이시도루스(Isidorus)에게 계획과 공사를 맡겼다. 이들은 이교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대담한 구조물을 실현하려면 건축가보다 기술가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정궁을 설계한 조셉 팩스톤,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브 에펠과 같은 엔지니어가 근대 건축을 본격적으로 연 것과 비슷하다.
이때 건설노동자 1만여 명과 현장 감독 100명이 일했으며, 감독 한 명이 100명을 맡아 현장 지휘하게 했다. 또 이들을 반으로 나눠 각각 건물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맡아 경쟁적으로 일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저 거대한 성당은 불과 5년 11개월에 완공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양쪽의 측랑을 열주랑으로 분리한 3랑식 바실리카인데, 건물의 가로 세로는 73mx82m이다. 중랑 위 중앙에는 지름 약 31m, 높이 56m인 거대한 돔을 얹었다. 33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다. 그래서 이 돔은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시켜 지어지도록 이끄셨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중랑 위 중앙에 돔을 얹고, 돔의 동서 방향으로는 반(半) 돔을 얹어 중랑(中廊)을 확장했다. 이로써 중심형이면서 동서의 축이 강조된 장축형이기도 한 비잔티움의 걸작이 되었다.
판테온은 원형 평면에 원형 돔이 올라가지만, 하기아 소피아는 정사각형 평면에 원형의 돔이 얹혀 있다. 사각형의 네 변은 아치가 받치게 되는데, 그러면 아치의 원호와 돔 평면의 원호 사이에는 정사각형 평면에 외접하듯이 올라가는 삼각 곡면이 생긴다. 이것이 펜덴티브(pendentive)다. ‘매달려 있다’는 말에서 나온 용어다.
전설에 의하면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7년 이 성당을 봉헌하며 약 1500년 전에 지은 첫 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면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얼마나 큰지 그 장려한 돔 아래에서 전례에 봉사하는 이들은 성가대를 포함하여 5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랑은 불과 몇십 년밖에 가지 않았다.
하기아 소피아의 중앙 돔. 출처=Stanford University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 건축물
553년에 지진으로 동쪽 아치의 머리가 약해졌다. 4년 뒤 557년 지진이 있었으나 부서진 곳을 수리하는 데 실패했다. 이듬해인 558년에 동쪽 대(大) 아치와 반 돔이 무너졌고, 중앙 돔은 절반쯤이 내려앉았다. 곧바로 재건 공사를 시작했으나 남아 있던 돔의 서쪽 부분도 주저앉았다. 이 무렵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루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시도루스의 조카인 같은 이름의 이시드로스라는 건축가(?)가 돔 전체를 다시 만들면서, 돔의 추력을 줄이기 위해 높이를 6.4m로 높이고, 40개의 리브를 추가하며 반원에 가까운 돔을 만들었다. 돔은 단단한 돌이나 콘크리트보다 더 가볍고 가소성이 강한 벽돌 골재로 건설했다.
4년 후인 562년에 복원되었다. 돔은 찼고, 돔 베이스에는 40개의 창문을 뚫었다. 모자이크로 가득 찬 돔은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전체를 6년에 지었던 것이 비하면 새로운 돔을 정말 신중하게 얹었다. 다만 돔의 추력에 견디도록 육중한 석조 버팀벽이 추가되어, 외관은 산을 마주 대하듯이 대단히 무겁다. 이 돔은 10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지진으로 다시 손상을 입었는데, 아르메니아 건축가 트르다트(Trdat, 940~1020)가 이를 고쳤다.
하기아 소피아는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과감함 때문에 구조 설계에 무리가 있었고, 황제가 준공 시기를 서둘러서 공사를 강행한 탓에 무리를 거듭하며 지어졌다. 그러니 하기아 소피아가 오늘날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런 하기아 소피아가 1453년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고 같은 해에 도시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하기아 소피아에서 전례에 참석한 마지막 회중의 탄식은 어떠했을까? 그러다가 2020년 7월 24일 금요일 85년 만에 도시 새벽을 깨우는 무슬림의 기도 소리가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