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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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활기차며 탑으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로마네스크’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31. 로마네스크 성당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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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 나랑코 성당, 오비에도, 스페인 북부(848년). 출처=Wikimedia Commons


서고트족에 의해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375년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역사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로마 제국의 동쪽에 머물러 있던 게르만 민족의 일부인 서고트족이 훈족에게 쫓겨서 서진해 왔다. 그리고 도나우강 국경을 넘어 제국 영토에 대거 침입해 왔다. 그러나 침입해 들어와서는 그곳에 이주했다. 그 이후에도 게르만의 여러 족속은 국경을 넘어들어와 계속 이주했다. 6세기 말까지 그들은 각지에 정착하면서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 이어지는 부족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이때 민족 이동의 물결을 타고 로마 영토에 들어온 게르만인은 약 8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역인 알프스 북쪽의 갈리아(Gallia) 지방으로 들어왔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처럼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고, 로마인이 건설한 도시나 갈리아인의 마을과 경작지가 섬처럼 점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고 도시라는 것도 몰랐다. 그들은 그저 자연을 숭배하고 엄한 자연환경 속에서 소박하게 생활하던 족속이었다. 그런 게르만인이 도시의 주변부에 정주하며 고도로 세련된 로마 문화에 접했다. 로마 제도와 문화를 동경하고 존경했던 게르만인은 로마 문화에서 민족이 성장하는 양분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인과는 전혀 다른 기질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던 그들은 로마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소박했지만, 활력이 넘쳤던 민족적 개성을 잃지 않고 수백 년에 걸쳐 독자의 문화를 창조했다. 그 결과 그들은 쇠퇴하는 로마를 대신하여 새로운 유럽 세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그리스도교는 이제까지의 황제의 궁정을 대신하여 문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황제의 지배하에 놓였던 동로마 교회와는 달리, 로마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발전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이 무렵 서유럽 교회의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던 로마 주교인 교황은 동방 교회를 분리하고 게르만족을 개종시키며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쌓아갔다.

주도권은 로마인에서 게르만인으로 바뀌었다. 중심지도 지중해에서 알프스 북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시대도 고대에서 중세로 바뀌게 되었다. 중세 초기는 전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여러 민족이 흥망이라는 혼란 중이었다. 로마 제국이 남긴 제도, 게르만족의 습관, 그리스도교라는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시대와 문화는 점진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때, 이 복잡한 요인을 중개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이처럼 중세는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세계관으로 동방 세계나 고대 지중해 세계와는 다른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생트푸아 수도원 성당 볼트, 콩크, 프랑스. 출처=Wikimedia Commons

중세 이후 그리스도교가 유럽 문화 주도

이때 성당이라는 건축공간은 그리스도교 문화만이 아니라 그것을 받쳐주는 유럽의 기층문화나 이민족(移民族) 문화의 속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앞부분의 중세 문화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후에 도시 형성에 밀접하게 관계하는 13세기 이후의 ‘고딕 양식’과는 달리 지방의 자연에 깊이 뿌리를 내린 독자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처럼 로마네스크는 유럽이 성립하는 시대, 유럽이 ‘유럽’임을 자각하는 시대의 문화였다.

그러면 중세는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난 것일까? 일단 교과서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역사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유럽 사람이 스스로 이상으로 삼는 그리스·로마와, 그런 고대를 재생한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 사이에 끼인 ‘중간 시대’를 ‘중세(中世)’라고 부른다. 그리고 중세 건축이나 중세 미술을 경멸하는 뜻으로 ‘고딕(Gothic)’이라고 불렀다.

이때 중세 성당 건축 양식에는 ‘무겁게 느끼는 것’과 ‘가볍게 느끼는 것’이 있다며 둘로 나누었다. 이렇게 중세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 것은 17세기 말이었다. 앞엣것은 ‘로마네스크’, 뒤엣것은 ‘고딕’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때 ‘로마네스크’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초인 1818년에서야 비로소 ‘무겁게 느끼는 것’을 프랑스어로 ‘로망(roman)’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풍’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에서 파생하여, 점차 지방색을 띠며 타락한 거친 양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이듬해인 1819년에 영어로 ‘로마네스크(Romanesque)’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로마네스크’라는 말에는 경멸하는 뜻이 강하다.

서유럽을 통합한 카롤루스 대제 시대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 등의 예외가 있지만, 중세 전기인 5~10세기 서유럽의 사회·경제는 전반적으로는 안정되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비잔티움 제국에 뒤처져 있었다. 건설 활동도 그 앞과 뒤의 시대에 비해 왕성하지 못했다. 실제로 6세기 이후 건설기술은 나빠졌다. 고전적 교양을 갖춘 건축가나 장인은 자취를 감추고, 로마 시대의 채석장은 생산을 멈췄다. 건축공간에서 가장 노력이 많이 드는 것은 석재를 운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될 수 있으면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석재, 그것도 비교적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건물을 세우는 것이 흔했다. 중세 초기에는 건축공사 전반이 영세해져서 성당을 재건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규모를 줄여 세웠다. 고대 로마 건축을 성당으로 전용하는 예도 많았고, 성채를 지을 때도 석조가 아니라 흙이나 목재로 건조되는 것이 많았다.

 
성 삼위일체 수도원 성당, 레세, 노르망디, 프랑스. 출처=Wikimedia Commons


11세기~12세기 중반 널리 보급된 건축 양식

그런데 11세기 이후 서유럽의 경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농업 생산이 증대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도시 경제가 발전했다. 그리스도 탄생 천 년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공포가 사라진 후에는 종교적 열정이 높아졌고 석조건물을 위한 기술도 높아져 성과 도시는 석조로 지어졌다. 건설 자재의 공급 체제도 확립되어 당당한 석조 천장이 덮인 성당이 많이 지어졌다. 이렇게 11세기에서 12세기 중반에 걸쳐 많이 건립된 성당 건축은 후세에 ‘로마네스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11세기에서 12세기 중반 또는 후반까지를 ‘로마네스크’라고 하며, 12세기 중반 또는 후반에서 15~16세기까지를 ‘고딕’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풍’인 로마네스크가 로마 제국에서 가져온 것은 세 가지였다. 바실리카에서는 길이를, 목욕탕에서는 교차 볼트를, 일반적인 로마 건물에서는 반원의 아치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새로운 건물을 만들었다. 로마의 바실리카는 길고 낮았는데, 로마네스크는 높고 활기차며 탑으로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로마의 원기둥은 하나의 주신(柱身)이었고 로마의 아치는 밑면이 매끄러웠으나, 로마네스크의 피어와 아치는 틀로 찍어내어 만든 듯 분절되어 있었다.

이로써 로마네스크 성당은 강하고 무겁고 분절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신비한 공간이 담겨 있었다. 특히 시간 차는 있으나 지역마다 다양한 재료와 전통에 기반하며 고대 로마 건축 요소를 응용했다는 것은 오히려 로마네스크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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