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32. 로마네스크를 만든 두 열정
'생갈 대수도원 평면'. 출처=medievalists.net
‘생갈 대수도원 평면’에 따른 모형. 출처=medieval.eu
천 년의 ‘공포’ 넘기자 성당 건축 잇따라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에는 암흑의 시대가 길게 이어졌다. 특히 서유럽은 중앙행정체계가 발달하지 않아 사람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상업과 교역이 허술하여 일상생활은 거의 자급자족에 의지했다. 이런 시대에 유럽의 질서를 유지해주는 한 줄기의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였다.
9세기부터 10세기 전반에 유럽은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세로 탈피하고자 했다. 사회나 경제가 안정되었고 농업기술의 진보로 생산력이 높아지고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성당을 지을 여력이 생겼고 이를 기반으로 그리스도교는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새천년기가 시작될 무렵 전쟁과 질병, 천재지변과 기근이 심했으며 이단도 많이 나타났다. 이에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지 1000년이 되면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헌신했다.
세계의 종말이라 믿어졌던 기원 1000년의 ‘공포’를 무사히 넘기게 되자 기쁨과 감사의 마음에 많은 성당이 지어졌다. 이때 모습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Abbaye de Cluny)에서 ‘세계사’를 정리한 라울 글라베르(Raoul Glaber, 985~1047)는 이렇게 기록했다. “1000년부터 세어서 3년째 될 무렵 거의 온 세계의 각지에서, 우선 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 성당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성당은 대부분 아주 잘 지어져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었는데, 그리스도교 공동체마다 더 훌륭한 건물을 짓고 싶다는 경쟁심이 일어났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마치 온 세상의 성당이 오래 입었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하얀 망토를 걸친 것 같았다. 주교좌 성당, 성인들에게 봉헌한 수도원 부속 성당 그리고 마을의 작은 공소까지 신자들에 의해 아름답게 다시 지어졌다.”
그가 말한 “하얀 망토를 걸친 것 같은 성당”이란 곧 돌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성당을 가리킨다. 크고 작은 성당이 종래의 무너지기 쉬운 목조와 흙벽, 변변치 않게 다듬어 쌓은 돌이 아니라, 하느님 집의 위엄에 맞게 견고한 돌로 하얀 눈처럼 빛나는 집이 다시 지어졌다. 전문 석공들과 함께 주민 모두가 나와 마음을 다해 돌을 쌓아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길. 출처=Spiro Kostof, A History of Architecture
9세기 말부터 순례의 길 걷는 열정 시작
이에 두 가지의 열정이 로마네스크 성당을 꽃피었다. 그 하나는 9세기 말부터 시작한 순례의 길을 ‘걷는 열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이런 열정에 순례자들이 지나는 길이 만들어졌고 다양한 길이 교차하는 곳에 마을이 생기고 도시로 커가기 시작했다. 주님의 땅인 예루살렘 순례도 그 하나였는데, 십자군이 형성된 것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특히 야고보 사도가 묻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길은 프랑스를 거쳐야 했으므로 프랑스에는 이런 도시가 많이 생겼다.
다른 하나는 수도원에 ‘숨는 열정’이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 의미와 권력을 정의하는 방식을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안정한 시기에 침략자, 부랑자 무리, 가난, 기근 배고픔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된 일종의 성이나 보루(堡壘)와 같은 공간 안에, 작고 고립한 내성(內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도원은 개인의 내적인 신앙과 다른 이들과의 공동의 사회적인 긴장이 있는 새로운 건축 형식이었다. 3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일부가 된 수도원 공동체는 점점 많아져, 5세기에서 10세기까지는 영국 제도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를 정도로 널리 산재하게 되었다. 이 ‘열정’은 많은 수도원과 성당을 세웠고, 이에 ‘걷는 열정’이 합쳐져 유럽을 도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신앙 공동체가 건물 안에서 공동으로 예배드리고, 개인이 기도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간을 포함했다. 농사도 지었고 관리를 위한 행정도 필요했다. 그래서 수도원에는 바실리카식 성당을 중심으로, 식당과 부엌, 손님방, 수도원장 사무실 등 일상생활을 위한 많은 공간과 농업, 예술, 지적 작업을 수용하는 공동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수도원은 도시 근교나 농촌에서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이루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리고 점점 더 큰 집단을 이루면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당시로써는 작은 도시를 훨씬 넘을 정도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했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수도원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조직이며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프랑스 퐁트네 수도원. 출처=france-voyage.com
성당과 수도원, 유럽 하나로 잇는 원동력
클뤼니 수도원은 도시에 지어져 ‘제2의 로마’라 불렸고, 시토 수도회(Ordre cistercien)는 모든 세속에서 격리된 자연 속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 두 수도회가 창설되고 나서 2세기 동안에 무려 1500개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중세 역사학자 장 짐펠(Jean Gimpel)은 “시토 수도원은 어느 지역에 세워졌어도, 시각장애인도 길을 잃지 않고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내부 구조가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수도원들은 놀랍게도 일정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두 수도회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도시나 마을의 성당이나 수도원 등을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유럽은 수도원의 네트워크였다.
수 세기가 지난 뒤에 수도원의 이상적인 평면도가 스위스의 생갈(Saint Gall, 잔크트 갈렌) 대수도원에 전해지고 있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13세기까지 대략 700년 동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스위스의 국보인 건축 도면이다. 한 변이 1m 정도 되는 양피지(113×78㎝)에 붉은 선으로 평면이 그려져 있다. 이 평면에 그려진 건물이 실제로 세워진 것은 아니고, 그것이 생갈 대수도원의 유명한 도서관에 남아 있어서 간단히 ‘생갈 대수도원 평면’이라고 부른다.
이 평면을 보면 성당의 남쪽에 중정과 회랑을 둘렀으며 동쪽에는 2층분의 수도자들의 공동 대침실을 두었고 그 밑에는 채난실(採暖室)이 있다. 남쪽에는 공동 대식당과 부엌을, 서쪽에는 저장고와 창고가 배치되었다. 회랑은 성당에서 식당으로, 식당에서 공동 침실로 이동하는 데 매우 편리한 통로가 되었다.
그 밖에도 수도원장과 손님 숙소, 순례자 숙소 등 수도원을 운영하기 위한 시설이나, 침실, 식당, 부엌, 빵 공장, 와인 저장소, 제분소, 곡창 등의 생활시설이 있다. 이런 정도면 120명에서 150명 정도의 수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공방, 학교, 도서관, 병원, 진료소, 밭, 과수원, 마구간 등 작은 읍을 형성할 만한 시설도 들어가 있다.
수도원의 자급자족 공간은 시토 수도회에서 완성되었다. 부르고뉴 지방의 퐁트네 수도원(Abbaye de Fontenay)은 성당이나 회랑 이외에 빵 굽는 화로, 손님용 경당이 있으며, 규칙을 위반한 수도자를 가두는 감옥도 있다. 또 다양한 개간, 농업, 목축을 하고, 수력 에너지로 움직이는 공작 기구를 발명·개량하는 공방을 두었다. 이러한 수도원의 선구적인 역할은 중세 경제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이바지했다.
이처럼 ‘걷는 열정’과 ‘숨는 열정’은 서구가 성립하는 시기에 그리스도교를 지방화·일상화하고, 로마네스크의 성당과 수도원이라는 건축공간을 만든 원동력이 되어 유럽을 하나로 묶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