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스크 성당을 보면 아케이드(arcade)가 중랑과 측랑을 나누고 있고, 그 아케이드를 원기둥 때로는 피어(pier)가 받치고 있음을 많이 본다. ‘아케이드’란 원기둥이나 피어가 받치고 있는 아치가 연속한 것이며, ‘피어’란 주두와 주초를 갖춘 고전 건축의 원기둥을 제외한, 단면이 여러 모양인 육중한 독립 기둥을 말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대 말기인 4세기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곳곳에 성당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성당들은 로마 건축의 연장선에 있었다. 432년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에서 보듯이, 이때 중랑의 벽은 여전히 고전적 규범에 따라 거대한 수평 부재인 엔태블러처(entablature)를 이오니아식 등의 열주가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벽은 코린트식 벽기둥(pilaster)으로 분할되었다.
고전 건축의 핵심은 기둥 아래의 반지름을 단위로 하는 수직의 비례 체계에 있었다. 이를 ‘오더(order)’라 한다. 따라서 고전 건축의 바탕인 원기둥은 당연히 긴 수평 부재인 엔태블러처를 받쳐야 했다. 그러나 4세기 성당 건축에서는 원기둥이 엔태블러처가 아닌 아치를 받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원기둥이 중랑과 측랑을 나누는 아케이드의 아치를 받치고, 그 아치로 그 위에 있는 벽을 받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아케이드를 ‘대(大) 아케이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고전 건축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원기둥은 여전히 사용했으므로 중랑에 면한 주요 부분은 오더의 원칙이 유지되었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원칙이 무시되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아케이드가 ‘오더’를 대신하여 중랑 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면 왜 엔태블러처는 포기되어야 했을까?
엔태블러처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쳐지는 하나의 크고 긴 돌이 쓰인다. 그러나 이런 석재를 잘라내어 운반하고 가공하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과 기술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과 기술은 고대 로마 말기에 이미 잃어버리고 있었다. 더욱이 엔태블러처는 본래 석조 건축의 구조로는 불리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성당에서는 엔태블러처 위에 넓은 벽을 얹게 되어 이 방식은 크게 불리했다. 따라서 돌로 짓는 성당으로서는 엔태블러처보다는 아치가 훨씬 유리했다. 이리하여 엔태블러처는 아치로 대체되었다.
원기둥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6세기 이후에는 성당을 짓는 데 고전적인 원기둥은 쓰고 싶어도 커다란 하나의 돌을 정확하게 잘라내어 가공해 얻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돌 하나로 독립 원기둥을 만든 예도 있었지만, 가공된 원기둥은 이미 제국 영토 안에 여기저기 있었으므로 쇠퇴한 도시에 버려진 건물에서 빼내어 와 다시 쓰면 됐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원기둥만이 아니라 다른 건축 석재를 빼내 전용하는 일이 흔했다. 이렇게 되자 고전 건축에서 주류였던 대리석 등의 채석장은 점차 문을 닫게 되었다.
거친 소박함이 로마네스크 건축의 기본
로마네스크기에 들어와 작은 마을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성당 건설의 붐이 일어났다. 이에 석재 수요는 급속히 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비싼 비용을 들여 다른 지방에서 양질의 소재를 운반하고, 우수한 기술을 갖춘 장인을 먼 곳에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었다. 작은 도시의 성당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방대한 석재는 그 고장에 가까이 있는 석재를 찾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잠자고 있던 채석장을 발굴하여, 다시금 몇 대에 걸쳐 잊혀 있던 돌쌓기 방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이 지어지는 이때 석회암이 주류였으나 지방에 따라 사암이나 화강암이 쓰였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지역적인 특성과 표현 양식은 이렇게 생겨났다. 그렇지만 바로 그 여건이 지방의 독자성을 발휘하여 우리를 매료시키는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발전하게 해 주었다.
또한 중세에서는 노예의 조직적 노동력은 이미 사라져 버려 마름돌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 운반할 수 있는 크기로 점차 작고 거칠게 만들어졌다. 원기둥 대신에 작은 돌을 조합해서 크게 쌓은 네모난 피어가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피어는 벽의 성격이 강하다. 성당의 벽도 로마 건축처럼 대리석을 덧붙이지 않은 단순한 구조물이 되었다. 중랑 벽은 대(大) 아케이드와 고창층을 뚫었을 뿐, 장식이 없는 평활한 벽은 깎고 도려내고 쌓아 올리며 조소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석회암이 지니는 거친 소박함이 로마네스크 건축의 기본이 되었고, 작은 돌을 쌓아 지은 원초적인 벽은 로마네스크 성당 조형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다만 정밀한 마름돌 기술은 발전하여 볼트 지붕 등의 대공간이 각지에서 시도되었다. 물론 이것은 실제의 사정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 문화가 쇠퇴하면서 비례와 조화에 바탕을 둔 고전적 미적 가치관은 사라지고, 그것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가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1020년 세워진 샤페즈의 생 마르탱 성당
프랑스 부르고뉴는 오래전부터 교류가 많은 교통의 요충지로, 광대한 평야에서 풍부한 농경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11세기에서 12세기에 종교적 중심이 되어 910년에는 클뤼니회, 1098년에는 시토회가 창립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원통 볼트와 교차 볼트 등 새로운 건축기법으로 새 시대의 개성이 풍부한 로마네스크 성당, 그 지방에서 나는 작은 돌을 정성스럽게 쌓아 거칠지만 원초적이고 소박한 로마네스크 성당이 잇따라 세워졌다.
이런 성당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당이 있다. 그것은 샤페즈의 생 마르탱 성당(glise Saint-Martin de Chapaiz)이다.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1020년경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의 하나였다. 외관의 벽과 높은 종탑은 마치 압축했다고 해야 할 정도로 간결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내부를 보라. 고장에서 나는 작은 거친 돌은 쌓아 지었다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지 않는가? 원 모양의 피어가 좌우 5개씩 10개 있는데, 평면도를 보면 커다란 점 10개가 두드러진다. 피어의 지름은 무려 1.4m, 벽 두께는 1m나 되며, 석재는 작고 불규칙하며 모르타르와 석재는 구별이 안 될 정도다. 피어 기둥은 두툼하다 못해 공간을 압도하고 있고, 그 위에 쌓은 벽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로마네스크 성당 공간을 대변하고 있다.
피어와 벽 일부는 1030년에 만들어졌고, 중랑의 원통 볼트는 1040년경에 덮었다. 이 원통 볼트 천장은 피어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어 그중 일부는 균형을 잃어 무너질 위험이 있어, 1050년경에 첨두아치로 바꾸었고 중랑 벽에 반원 기둥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둥근 피어 머리에 삼각형은 이때 덧붙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반원 기둥과 횡단 아치는 수직성을 강조해주게 되었다. 이 성당만큼 육중하고 견고하며 강인한 로마네스크 성당을 잘 나타내는 성당이 과연 또 있을까?
로마네스크 성당의 벽은 엄청나게 두꺼우며, 개구부가 거의 없거나 작다.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 부재가 벽과 벽의 단면을 가진 피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기둥, 벽기둥, 아치 또는 그렇게 보이는 고딕 건축과 크게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