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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딕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궁전’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4.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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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출처=Daisy Peel

 

‘성모의 베일’,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Leon Reed

 


초기 고딕 건축이 지향한 최고의 열매 맺어

쉬제르에 의한 생드니 성당의 재건 사업은 일드프랑스에서 재빠르게 대단한 평판을 얻었다. 그는 제단부와 서쪽 정면을 완성하고서 카롤링 왕조에 세워진 회중석 부분도 재건하고 싶어 했다. 이때 여러 이웃 도시가 앞을 다투며 생드니 성당의 구조나 예술성을 보고 배워 쉬제르보다 빨리 본격적인 대성당을 지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성당 건설은 상스(Sens)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고, 얼마 안 되어 파리, 노와용(Noyon), 상리스(Senlis), 랑(Laon)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도시는 대성당 건축에 따르는 정치적인 위신도 닮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생드니 성당의 장려한 성전 봉헌식이 있은 지 30년 후인 1174년, 상스 출신 건축가 기욤(Guillaume)이 영국에 초청되어 대화재를 입은 캔터베리 대성당의 제단 건설공사를 감독했다. 고딕 양식이 서서히 국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80㎞ 정도에 떨어진 프랑스의 곡창지대 보스(Beauce) 평야의 파도 치는 밀밭 저쪽에 100m가 넘는 아름다운 두 개의 첨탑이 떠오른다. 600년이나 넘게 약탈, 전란의 격동을 견뎌온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Cathdrale Notre-Dame de Chartres)이다. 몇 번의 화재를 견디며 기적과도 같이 서 있는 성당, 프랑스 고딕 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 건축공사는 1130년부터 13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끊어졌다 이어지며, 최종적으로는 최고 기술로 초기 고딕 건축이 지향한 최고의 열매를 이 대성당에서 맺었다.

적어도 이 성당이 서 있는 자리에는 모두 전쟁이나 화재로 손상된 건물을 대체하느라 다시 세워진 5개의 대성당이 있었다. 최초의 성당은 늦어도 340년 경이었을 것이다. 6세기에 새 성당이 건설되었다가 743년에 불탔고, 이 성당도 858년의 화재로 손상되었다. 이것을 확장하여 재건축했는데 카롤링 시대의 성당도 102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시 22년에 걸쳐 새 성당을 짓고 1024년 헌당했다. 또다시 1134년 이 마을에 일어난 대화재로 서쪽 끝 부분이 불탔으나 곧바로 재건에 착수했다. 그런데 1194년에 큰 화재가 다시 일어나 이 마을의 절반을 태웠고 대성당도 소실되었다. 이에 재건에 착수하여 1150년에 공사를 마쳤다.

고딕 대성당이 유럽에 건설되기 시작한 12세기 후반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어져 갔다. 성모 공경은 12세기 초부터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아일랜드계 신앙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온 유럽에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 공경과 함께 많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부분 ‘노트르담(Notre-Dame)’이신 성모께 바쳐졌다. 이런 때 프랑스의 성모 공경의 중심이 바로 샤르트르 대성당이었다.
 

 

'아름다운 유리창의 성모',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pilgrimtothepast.com


‘성모의 베일’ 가진 성모 공경의 중심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 샤르트르 지방은 기원전부터 켈트의 한 분파인 카르누테스(Carnutes)의 거주지였고, 로마령 갈리아 시대에는 켈트 사제 계급인 드루이드가 신성한 샘과 동굴을 중심으로 신성한 의식을 거행했던 드루이드교(Druidism) 예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복음을 받은 켈트인은 그것을 예수 탄생의 전조로 해석하고, 드루이드교의 처녀 신앙의 동굴을 성모 마리아(노트르담) 신앙의 장소로 바꾸었다. 그래서 중세까지 지하 경당에서 ‘검은 성모자’ 상을 공경해 왔다. 현재 샤르트르 성당 지하 경당의 북쪽에 안치된 검은 성모는 프랑스 혁명 때 타버린 상을 1857년에 복원한 것이다.

12세기에는 유해 공경이 한창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유해가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유해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으므로 유해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당신이 매달리셨던 그 십자가와 가시관, 토리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다. 성모 마리아의 몸은 죽은 후 천사들에 의해 하늘나라로 올라갔으므로 유해가 없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생전에 입었던 옷이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귀중한 유해가 된다.

이런 곳에 세워진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가지고 있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모의 베일’ 곧 ‘상타 카미사’(Sancta Camisa)는 비잔티움의 이레네 황후에게 샤를마뉴(Charlemagne)가 선물로 받은 후, 876년 그의 손자 대머리 왕 샤를 2세가 이 공경받는 유해를 샤르트르 대성당에 기증했다. 이 옷은 천사 가브리엘이 수태고지 할 때 입었고, 그리스도를 낳을 때 성모 마리아가 입었다는 옷 조각, 성모가 일할 때 입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직사각형의 비단 조각이다. 20세기에 조사했을 때 천에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꽃가루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고, 현재의 과학적 판정에 의하면 이 옷감은 사산조 페르시아(3~7세기) 산이라고도 한다. 그 이후 ‘성모의 베일’을 가진 대성당을 찾는 순례 행렬은 8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기둥의 성모', 복원 전,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Walwyn

 


화재로 1220년 ‘고전 고딕 대성당’ 재건축

그런 샤르트르 마을에 1194년 6월 10일 밤부터 11일 아침까지 화마가 다시 덮쳤다. 이 화재로 서쪽 정면의 ‘왕의 문’, 그것에 새겨진 조각과 12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초기 고딕의 남쪽 탑 기단부 등이 거의 다 타 버렸다. 단지 화마를 피한 것은 12세기에 건조된 서쪽 정면부와 지하 경당뿐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성모의 베일’을 잃었다고, 그래서 성모께서 샤르트르 마을을 버리셨다고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지하 경당에서 무사히 화마를 피했던 ‘성모의 베일’이 운반됐다. 그러자 비탄은 순식간에 환희로 바뀌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성모가 옛 성당을 부수기를 허락하셨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새롭고 더욱 아름다운 성당을 원하고 계신다고 성모의 집에 맞게 다시 지을 것을 청하셨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각지에서는 기부금이 답지했다. 불과 26년 후인 1220년에 다섯 번째 성당이 대체로 완성되었고, 본래는 서쪽 정면까지도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세울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전체 길이 130.2m, 회중석 너비 16.4m, 천장 높이 36.55m인 당시로써도 가장 컸고 지금도 프랑스에서 제일의 큰 대성당이, 그 후 이 건물을 본받아 지어진 랭스(Reims)와 아미앵(Amiens) 대성당과 함께 ‘고전 고딕 대성당’이라 불리는 성숙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이윽고 1260년 10월 24일 성왕 루이 9세가 임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거행했다.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답게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정말 많은 성모상이 있다. 지하 경당의 ‘지하의 성모(검은 성모)’, 주보랑 남쪽에는 12세기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름다운 유리창의 성모’, 주보랑 북쪽에 선 ‘기둥의 성모’(1510년 제작), 샤르트르 대성당의 가장 유명한 제단부 고창 중앙에서 하늘의 여왕으로 푸른 옷을 두르신 ‘성모자상’ 등. 하나의 성당에 이 정도의 성모 마리아상을 가진 대성당은 없다. 그래서 샤르트르 대성당을 두고 ‘성모 마리아의 궁전’에 가장 어울리는 성당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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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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