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동북동 쪽으로 130㎞ 떨어진 베슬르(Vesle) 강이 흐르는 도시 랑스(Reims)에 ‘프랑스 성당의 여왕’, ‘고딕 대성당의 고전’이라 부르는 최고 걸작 랑스 노트르담 대성당(Cathdrale Notre-Dame de Reims)이 있다.
496년 프랑크 왕국 초대 왕이자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Clovis I)가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 레미기우스(Remigius, Rmi)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이 정식으로 성립했고, 이를 계기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설한 갈로-로마 목욕탕이 있던 곳에 20mx55m 크기의 주교좌 성당이 건설되었다. 816년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루이 1세(경건왕)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 후 1223년 루이 8세부터 1825년 샤를 10세까지 25번의 프랑스 왕 대관식이 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429년 잔 다르크가 참석한 샤를 7세 대관식도 거행되었다.
862년에는 이중 제단부가 있는 성당이 새로 봉헌되었다. 그 후 중축을 거쳐 생드니의 쉬제르의 친구였던 삼손 대주교(Samson of Mauvoisin)에 의해 생드니처럼 주보랑에 방사형 경당이 있는 건물로 크게 개축되었다. 그러나 이 대성당은 1210년 5월 6일 랑스의 대화재로 마을과 함께 불타버렸다. 이에 오브리 드 윔베르(Aubry de Humbert) 대주교는 건축가 장 도르베(Jean d‘Orbais)로 하여금 국왕의 대관식에 걸맞은 대성당을 전면적으로 재건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1211년 동쪽 제단부부터 재건 공사에 착수했다. 이때는 화재를 입은 샤르트르 대성당을 1194년경부터 고딕 양식으로 한창 재건 공사를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샤르트르 대성당을 모델로 했다. 최초로 표준화된 크기의 돌을 사용한 건물의 하나여서 현장에서 돌을 자르지 않았다.
1210년 대화재로 80년 동안 대성당 재건
그 후 건설비에 쓰일 중과세에 시민이 반발하여 1233년에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1236년에 재개하여 제단부는 1241년에, 회중석은 1290년에 완성되었다. 약 80년 동안 지속된 공사에 네 명의 다른 건축가가 바뀌었다. 그래도 15세기 후반까지 성당의 확장과 장식 공사는 느리게 계속되었다. 이처럼 긴 시간 속에서 그 시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워지는 고딕 대성당은 전체적 통일이 불가결인 고전 건축과는 달리 완벽하게 통일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본래의 디자인이 일관하여 계승되었다. 아주 드문 예다.
샤르트르와 비교하여 내부에서는 평탄한 벽면이 적어졌고 외관도 중후하지 않고 가볍게 보인다. 정면의 세 포탈도 앞으로 밀어내듯이 입체적으로 지어졌다. 버팀벽과 플라잉 버트리스도 육중한 샤르트르와 달리 돌의 구조체를 예술적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조각도 포탈 주변에 집중한 샤르트르와는 달리 수많은 조각이 외부의 여러 곳에 분산 배열되었다.
랑스 대성당 정면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면의 하나로 손꼽힌다. 포탈의 탱팡(팀파눔, 출입문 위에 업ㅈ혀있는 반원·삼각형 부조 장식)은 보통 첨두형 벽면에 부조로 표현되지만, 여기에서는 세 문 위의 탱팡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졌다. 랑스 대성당의 독자적인 수법이다. 내부에서는 거대한 첨두아치가 커다란 장미창, 중앙 문과 그 탱팡의 장미창에도 접하고 있다. 좌우 두 문도 측랑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내부 공간 형태가 그대로 외관이 되었고, 내부에서는 빛의 정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딕 양식의 중요한 장식 요소인 ‘바 트레이서리(bar tracery)’가 랑스 대성당에 최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트레이서리(tracery)는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의 유리를 지지하며 창문 등을 다양하게 나누는 몰딩인 돌 막대나 리브 등을 말한다. 이에는 돌판에 구멍을 뚫은 ‘플레이트 트레이서리(plate tracery)’와, 창문의 중간 문설주인 멀리온(mullion) 역할을 하도록 그 후에 고안된 ‘바 트레이서리’가 있다. 이것이 있기에 얇은 돌로 더욱 섬세하게 구성되어 유리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각으로 나타낸 주제도 여느 성당과는 달리 탱팡 위의 삼각형 페디먼트로 옮겨졌다. 중앙의 페디먼트에는 관을 받으시는 성모가, 오른쪽에는 최후의 심판이, 왼쪽에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조각되어 있다. 중앙 입구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가, 그 좌우 벽에는 주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 왼쪽 문에는 13세기 조각의 걸작 ‘미소 짓는 천사’가 있다. 양감(量感)이 압도적인데도 표정과 몸짓, 옷의 주름까지 사실적이다.
고딕 장식 요소인 ‘바 트레이서리’ 최초 등장
내부를 보자. 회중석은 3랑이고 제단부는 5랑이다. 전체 길이 149m로 샤르트르보다 약 8m 더 길다. 베이(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는 10개이고 길이는 139m, 회중석 길이는 115m에 이른다. 이곳이 대관식 대성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 경당 5개가 붙은 동쪽 제단부는 너비가 61.3m인 횡랑과 거의 같아 유난히 간결하고 널찍해 보인다. 볼트는 38m로 샤르트르보다 1m만 높지만, 중랑의 폭은 13m로 샤르트르보다 3m 좁아 훨씬 훤칠해 보인다. 다만 본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내부는 밝다.
이런 내부가 직사각형 베이의 중랑과 정사각형 베이의 측랑, 교차부 모두 4분 볼트로 덮여 있는 데다가, 측랑과 고창층에 같은 유형의 창을 두어 통일된 느낌을 준다. 이에 제단 뒤로는 중앙의 경당에 샤갈이 그린 푸른 색조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이고, 제단 위 곡면 고창층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깊이 끌어당기고 있어 제단으로 나아가는 통로는 더욱 깊어 보인다.
중랑 벽의 대(大) 아케이드 기둥도 공간적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커다란 원기둥이 받치고 있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달리 샤르트르에서는 이와는 달리 원기둥에 팔각 기둥 4개를 붙인 복합 기둥과, 팔각 기둥에 4개의 원기둥을 붙인 복합 기둥이 번갈아 서 있었다. 이런 복합 기둥을 ‘필리에 칸토네(pilier cantonn)’라 하는데, 이런 기둥을 쓰면 5개의 리브로 상부 구조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은 큰 원기둥에 작은 원기둥 4개를 덧붙인 기둥만 서 있다. 그 결과 거대한 물질적 특성은 많이 사라지고 4분 볼트의 리브와 더욱 연속하게 보였다.
한편 고전 고딕에서는 트리뷴이 없어지고 아케이드가 아주 높은 3층 구성을 했다. 그러나 3층 구성을 로마네스크 성당과는 달리 측랑과 고창층의 커다란 빛의 벽이 중랑을 비춰주었다. 그렇지만 중랑의 벽면 전체가 빛의 벽이 되지는 못했다. 측랑의 경사지붕이 닿는 지점에는 벽으로 막고 그 바로 앞에 작은 아케이드를 둔 트리포리움이 수평 띠로 구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트리포리움의 수평 띠는 마주하는 고창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을 받아 비교적 밝았다. 그러다가 아미앵 대성당에서는 제단부 위에 트리포리움마저도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땅에서 하늘을 향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한층 크게 강조되었고, 이 땅과 저 하늘은 빛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런 고전 고딕의 조형과 공간적 의미를 순수하게 실현한 성당이 랑스 대성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