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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 가톨릭푸름터 설립자 양 수산나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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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넘게 대구 지역의 가난한 청소년과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푸름터 설립자 양 수산나(수산나 메리 영거, 한국명 양수지) 여사가 10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8세.

 

장례 미사는 12일 오전 10시 대구대교구 대봉성당에서 거행된다. 고인의 장지는 가톨릭 군위묘원이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고인은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했다. 영국에서 우연한 기회로 한국 교회사 특강을 접하고, 박해와 순교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한 외국인 신부를 통해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양 여사는 사도직 협조자(아욱실리움) 회원으로 대구대교구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초청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당시 효성여대 피아노과에 학생들이 연습할 피아노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중고 피아노 7대를 모아 배편으로 실어왔다.

 

양 여사는 효성여대에서 영어 교수로 지내며 구두닦이 소년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갈 곳 없는 여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와 약혼한 상태였던 양 여사는 대구의 가난한 아이들과 지내며 기쁨을 느끼고, 혼인 성소를 포기한다. 약혼자에게는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봉투에 약혼반지를 넣어 우편으로 보냈다.

 

1960년 12월부터 대구가톨릭근로소년원에서 사회사업가로 재직한 후 1962년에는 대구 삼덕동에 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을 설립했다. 그는 인성교육을 비롯 미용·자수 등 다양한 기술교육으로 여성들의 자립을 도우며 대구지역 사회복지에 초석을 다졌다.

 

1971년 광주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지낸 후 1973년 프랑스 루르드의 아욱실리움 문화양성센터에서 문화양성지도자로 일했다. 2004년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양 여사는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2010년 영주권을 취득했다. 이듬해에는 대구광역시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 2004년부터 가톨릭푸름터 고문으로 활동했다.

 

양 여사는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하느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깨달으려면 인간의 사랑이 필요하다”면서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귀족이나 정치인이나 거리 부랑인이나 모두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 그들도 사랑을 내어줍니다. 누구든지 날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되는 거죠.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알아들어요.”(양 수산나)


관련 기사 → cpbc News : [낮은 데로 임하소서] 가난한 한국과 결혼한 '벽안의 천사'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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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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